1930년대 한국 역사 - 1930nyeondae hangug yeogsa

1중국 연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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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부터 월경천입으로 중국땅에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동북조선민족은 나름대로 자기의 역사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지역상의 민족인구분포에서 대분산, 소집중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조변계인 두만강과 압록강의 북안지역들에 상대적으로 독립된 조선민족사회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둘째, 천입민족인 동북조선민족은 그 절대다수가 빈곤한 농민들로서 사회최하층에서 비참하게 생활하였다. 셋째, 동북조선민족의 사회혁명성 특히는 반일혁명투쟁성은 보다 강렬하였다. 넷째, 과경(跨境)민족인 동북조선민족의 최초기의 사상정치운동은 조선국내의 정치사상운동과 밀접히 연계되어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조선혁명을 하는 객관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북조선민족사회에 반일혁명사상을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동북 여러 민족들의 반일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1930년 이래 동북의 조선민족 공산주의자들은 공산국제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조직원칙에 따라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대량 가입하게 되었으며 중공 동북당조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중공당이 영도하는 동북항일무장투쟁에서 조선민족은 선봉모범작용을 일으켰는 바, 그 원인은 첫째, 동북조선민족은 일찍부터 망국노의 비참한 사회생활을 격었었고 일제의 침략야심과 그 야만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일제에 대해 들끓는 민족적 원한과 복수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둘째, 그들은 사상상과 조직상에서 이미 비교적 좋은 기초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히 준비되어 있었다. 셋째, 그들은 이미 장기간에 걸쳐 각종 형식의 반일혁명투쟁을 진행하였으며 피와 눈물의 교훈속에서 오로지 무기를 들어야만이 민족해방의 리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교훈을 잘 알고 있었고 오직 중공당의 통일된 영도하에 동북의 여러 형제민족 인민들과 어깨겪고 공동으로 싸워야만이 강대한 일제침략자를 전승할 수 있다는 도리를 누구보다도 명철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넷째, 그들은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보귀한 경험교훈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일정한 물질적 기초도 갖추고 있었다. 다섯째, 중공당 초기의 항일유격대가 활동한 지방은 대부분이 원 조선독립군과 조공당의 활동지역으로서 건실한 군중기초와 투쟁경험 및 유격투쟁의 지형적 우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기초하여 조선민족 항일혁명자들은 중공당이 영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주력부대들의 초창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후의 동북항일연군의 핵심부대들에서 골간선봉작용을 하였다.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에 조선민족의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인 김일성, 김책, 최용건, 허형식, 이홍광, 이동광 등이 선후로 중공 동북당조직과 항일부대내에서 매우 주요한 영도직무들을 책임졌는 바, 이것은 1930년대 초기 조선민족이 동북항일무장투쟁중에서의 특수한 역사지위, 크나 큰 역할공헌과 결코 갈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특수한 역사지위와 공헌은 오늘날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의 보다 돌출한 정치지위에도 견실한 역사기초를 마련하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60年代開始以越境遷入而形成的中國東北朝鮮民族社會具有其歷史特殊性. 其一, 是在地域人口分布上具有大分散, 小集中的特点, 在中朝邊界-圖們江和鴨綠江的北岸地區形成了相對獨立的朝鮮民族社會文化圈. 其二, 作爲一個新的遷入民族的東北朝鮮民族, 其絶大多數是貧窮的農民, 他們處在社會最下層地位, 過着毫無社會政治權利的悲慘生活. 其三, 東北朝鮮民族具有更爲强烈的社會革命性, 尤其是反日革命鬪爭性. 其四, 作爲跨境民族的東北朝鮮民族最初的思想政治運動是與朝鮮國內政治思想運動緊密連繫在一起的, 在其‘朝鮮的延長’線上進行的. 他們的反日革命活動, 盡管具有在中國進行朝鮮革命的不可克服的客觀局限性, 但在東北朝鮮民族社會廣範傳播社會革命思想, 長期組織和進行反日革命活動, 喚起東北各兄弟民族人民的反日愛國革命性方面, 起到了積極而重要的歷史作用. 1930年以來, 東北的朝鮮民族共産主義者根據共産國際的‘一國一黨’組織原則, 以個人身分大量加入中國共産黨, 幷占據了中共東北黨組織的絶大多數. 1931年‘9.18事變’以後, 朝鮮民族在中共黨領導的東北抗日武裝鬪爭中, 起到了積極主動的先鋒模範作用. 其原因和條件是, 其一, 東北朝鮮民族早已經歷了作爲亡國奴的悲慘的社會生活, 早已認淸日帝的侵略野心及其野蠻殘暴性, 對日帝抱有深讎大恨. 其二, 朝鮮民族有批判性的繼承和發展了獨立軍和朝鮮共産黨的反日革命傳統, 在政治思想上和組織建設上已有了較好的基礎與條件準備. 其三, 朝鮮民族早已獨立進行過長時期各種形式的反日革命鬪爭, 在血和淚的敎訓中進一步深刻認淸了只有拿起槍杆子才能實現民族解放, 唯有在中共黨集中統一領導下與東北各兄弟民族人民共同戰鬪才能戰勝强大的日帝侵略者的時代眞理. 其四, 他們已有義兵和獨立軍抗日武裝鬪爭的寶貴的經驗敎訓, 也具有一定的物質基礎, 如武器裝備等. 其五, 中共黨初期抗日游擊隊的活動地區大都是原朝鮮獨立軍和朝共黨活動地區, 具有堅實的群衆基礎及有利於游擊鬪爭的地形優勢. 基於以上諸原因和條件, 朝鮮民族抗日革命者在創立東北人民革命軍各主力部隊的過程中能够起到積極主動的主導作用, 也能够在其後的東北抗日聯軍各核心部隊中起到了骨幹先鋒作用. 在1930年代和1940年代前半期, 東北朝鮮民族著名的共産主義者金日成, 金策, 崔鏞健, 許亨植, 李紅光, 李東光等, 先后擔任中共東北黨組織和抗日部隊的主要領導職務, 是以1930年代初期朝鮮民族在東北抗日武裝鬪爭中的特殊的歷史地位和巨大的作用貢獻所決定的, 同時, 這一特定歷史上的巨大貢獻也給今日朝鮮族在中國社會中的相對的優越地位奠定了堅實的歷史基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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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東北朝鮮民族, 抗日武裝鬪爭, 中共東北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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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은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경까지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을 보면, ① 대한독립군, ② 군무도독부, ③ 북로군정서, ④ 국민회군, ⑤ 의군부, ⑥ 대한정의군정사, ⑦ 한민회군, ⑧ 조선독립군, ⑨ 의단, ⑩ 대한독립군비단, ⑪ 광복회군, ⑫ 의민단, ⑬ 흥업단, ⑭ 신민단, ⑮ 광정단, 야단, 혼춘군무부, 국민의사부, 대진단, 백산무사단, 혈성단, 태극단, 노농회, 광영단 등(북간도지방)과, 서로군정서, 신흥학우단, 광한단, 대한독립의용단, 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천마산대, 보합단, 의성단 등(서간도지방)과, 대한독립군결사대, 대한신민회, 대한독립군 등(노령지방)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선도적으로 ① 1919년 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하였으며, ②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경찰관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기관을 습격하였고, ③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독립군부대들이 이듬해부터는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진입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측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3개월 동안에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진입이 24회에 달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이 32회에 달하였으며, 일제관서와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이를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鳳梧洞)까지 추격해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출병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제1대대, 이범석이 지휘하는 500여명의 사관생도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제2대대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500명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하여 패주시켰다.

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이다.

청산리독립전쟁의 대승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노령일대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 12월에 밀산(密山)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갔다가 1921년 6월에 자유시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신민부(1924)·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國民府)(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1운동 후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金元鳳)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예컨대 ①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년 3월), ② 부산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9월), ③ 밀양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12월), ④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년 9월), ⑤ 일본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총살저격사건 (1922년 3월), ⑥ 종로경찰서 투탄사건(1923년 1월), ⑦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우체국·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년 3월), ⑧ 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1923년 12월), ⑨ 일본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년 1월), ⑩ 의열단 군자금사건(1925년 10월), ⑪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사건(1926년 12월)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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