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 업적 - cheogjungyeong eobjeog

1. 단기필두로 포로를 되찾다.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다. 

2. 홀로 성을 빼았다.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윤관이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 라고 호언하였다.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였다 

3. 100기로 5만의 포위를 뚫다.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에 고려군이 다 무너져 겨우 1000여 명만 남았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이르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고 소리치며 우뢰와같은 기합과 함께 100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여진족 부관 10여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거꾸러 뜨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졌다. (이 일로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의 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4. 100기로 2만군을 물러가게 하다.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 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터이니 청컨데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5. 원군을 위해 홀로 적진을 뚫다.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가자 지휘를 부관에게 맞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였다.

6. 인종을 구해라

1126년 5월,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었다.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에게 다가가려 하자 왕을 모시는 상선(내시 우두머리)이 두 팔을 벌려 자객들을 가로막고 버티었다. 이에 자객 우두머리 주충이 일시에 상선의 목을 잘라버리니 이제 어전에는 인종과 사관밖에 남지않았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문이 통째로 박살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다.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 모습이 조조의 장수 악래 전위가 현신한 듯 하여 자객들과 주충은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명을 베어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 이 공으로 인종은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인종의 미움을 받다가 1127년에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功)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다.”라는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고, 이듬해 곡주로 이배되었다. 1130년에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하여 처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었다.

1144년에 지난날의 공으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다가 곧 죽었다.

실제 고려사에 나온 척준경에 대한 글이 이정도 남아있고 본다면 미쳐 기록되지 못한 그의 업적이 얼마나 거대할지 한번 생각해본다. 또한, 고려나 조선사를 보면 역적의 삶이나 공따위는 감히 역사에 남기지 않는 전통아닌 전통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한때 ' 역적 ' 이였던 척준경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본다면 고려또한 그를 진정 ' 영웅 ' 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참, 말을 못한게 있다면 비록 척준경은 유배생활로써 허무한 죽음 맞게되지만 후일 고려왕이 다시 그의 공을 인정하여 고려 본토에 불러드려 묘를 마련했다고 한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 기(騎)가 추격해오자 또 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영주(英州)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1 

척준경은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문효왕 시기 여진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초기의 유금필, 후기의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다. 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전공을 세운 그는 1, 2차 정벌 동안 재상인 윤관과 친해졌으며 전쟁 종결 후 문관직에 올라 점차 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인종 공효왕 대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정권을 주도했지만 결국 인종에 의해 제거된다. 척준경은 전쟁에서의 공은 걸출했으나 정쟁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져 후대의 평가도 갈리게 되었다.무예만 놓고 보면 척준경은 따라올 수 없는 전공을 세운 무사였다. 한국사에 등장한 무장 중 전술 전략의 구상 및 지휘의 형태가 아닌 개인의 무력만으로 척준경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운 무장은 없다. 그러나 척준경 본인은 단순히 순수한 무인이었을뿐 나름의 정치적 식견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고 전장에서는 일당백이었으나 배움이 짧고 인간됨이 맞지 않아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척준경에 비교되는 무인들을 봐도 유금필, 최영,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백전불태에 가까운 명장들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최소한 큰 누가 될 만한 행동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척준경에겐 그러한 감각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몰라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 때는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이기도 한 윤관의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후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이면 권신 이자겸이라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결국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칼로 흥한 자의 표본.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맹활약하고, 이후엔 권세를 쥐었지만 결국 몰락하고 만다. 그는 결코 권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장에 있어야 할 인물이었지만 결국 잘못된 주인을 만나 떨어진다. 누구와도 뒤지지 않는 무력을 지녔지만 정작 분별력이 떨어져 스스로 제 목을 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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