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동막골 좌파 - welkeomtudongmaggol jwapa

최근 지식인들의 관심을 끈 화두 중의 하나는 동막골이란 영화인 것 같다. 사석은 물론이고 지난 주 열린 한 학회 발표장에서도 이 영화는 단연 화제였다.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남북연합군이란 감독의 발칙한 상상력 때문이었다.

과거 공동경비구역이란 영화가 중립국 여군 장교의 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남성주의적 전쟁 문화를 나지막이 비판했다면, 이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동막골이란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사는 한 미친 (그러나 매력적인) 소녀의 시선을 통해 과연 누가 진정한 광인인가를 도발적으로 묻고 있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 중 감독의 상상력에 감탄한 이도 있지만 일부는 지나치게 오버한 것 아니냐는 인상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사실 동막골보다 더 오버한 시나리오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 프로젝트로 추진된 적도 있다. 바로 미국과 북한이 연합해 일본에 대항한다는 내용이다.

놀라지 마시라. 다소 황당한 이 시나리오의 원작자는 바로 다름 아닌 '미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다(마이클 브린 2005, 42). 역시 영화 매니아다운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그 제안을 당 고위간부를 통해 전해들은 미국 관리의 황당한 표정이 어땠을지는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우리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

필자가 3회째 연재하고 있는 미국과 쿠바의 대결의 역사도 원래는 지금처럼 그렇게 암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쿠바가 북한처럼 공산주의의 흉가로 변했지만 쿠바혁명 당시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는 사르트르라는 석학이 마치 동막골의 촌장을 가리키듯이 '우리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칭송했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쿠바를 동막골과 같은 매혹적인 유토피아로 만들 무한한 열정과 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 폭격기가 위협한 동막골과 달리 그들의 꿈을 짓밟은 것은 단지 '미 제국주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미 제국주의'와 '협력'해 미국과 쿠바 간에 상호 적대적 긴장을 상승시켜 온 스스로의 커다란 오류가 한몫 했다. 게바라가 한때 호언장담한 것처럼 '살인기계'로 단련된 그들이 완전한 전사였는지는 모르지만 사르트르의 판단과 달리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던 셈이다(그런 점에서 살인기계를 추구한 게바라를 쿨한 이미지로 만들고자 하는 자본주의 마케팅이나 휴머니스트로 복원시키려는 일부 좌파들의 프로젝트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그간 북미관계가 그러하듯이 지금까지도 쿠바와 미국은 누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는가를 두고 닭과 달걀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케네디의 보좌관을 지낸 슐레진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미국이 경제적 봉쇄 등의 카드를 1960년 7월에 가서야 비로소 꺼내기 시작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오래 전에 카스트로가 시작한 쿠바 정부의 공산주의화 음모에 대한 대응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1965, 222). 반면에 카스트로 서기장은 92년 하바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특유의 장광설로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미국의 책임을 성토했다.

사실 미국과 쿠바의 상호 악화 행위는 어느 일방의 문제라기보다는 '적대적 상호의존'(antagonistic co-dependency)과도 같은 성격까지 지닌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이 적대적 상호의존 개념은 흔히 분단 체제 하에서 남한과 북한의 정권들이 표면적으로는 상호 적대적으로 대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적대적 존재로 인해 자신의 체제 기반을 공고히 하는 역설적 효과를 지칭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적대적 태도는 한편으로 카스트로 정권이 자신의 정권과 사회주의 체제의 생존을 쿠바인들에게 동일시하게끔 유도하기 쉽게 만들어주었다. 동시에 카스트로의 적대적 행위는 미국 행정부로 하여금 쿠바에 대한 군사주의적 정책을 쉽게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원군이었다.

처음부터 카스트로가 악의 화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카스트로라는 인물은 소련의 레닌이나 중국의 모택동과 달리, 미국에게 하나의 수수께끼같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카스트로가 멕시코에서의 망명에서 돌아와 게릴라 혁명가로 활동하던 1957년 봄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고향에 CIA 요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 탐문 조사의 결과는 어디에서도 그가 공산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는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카스트로를 담당했던 선생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는 착실한 가톨릭 교도이며 결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임을 증언해 파견된 미국팀을 안도에 젖게 했다. (당시 미국팀은 어린 시절 카스트로의 별명이 '미친 아이'라는 것을 모르고 귀국했다. 그들은 그 별명의 의미를 쿠바 미사일 위기 기간에 혹독히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에 대한 미국 정계의 우호적 이미지는 카스트로의 동생이며 게바라와 더불어 보다 전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었던 라울이 미국 시민들과 군인들에 대해 일련의 납치 테러를 조직하면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들이 내건 명분은 미국이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지원하는 무기 수출 및 관타나모 기지를 통한 반혁명 행위 등의 중단이었다.

사실 미국은 그 간 부패한 군사독재와 연합해 쿠바에서 천문학적 이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인질극은 1958년 7월 중순 미국이 바티스타 정권에 무기 수출을 유보하면서 종료됐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미국의 무기수출을 잠시 유보시킨 대가로 치명적인 손해를 보고 말았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계에서 카스트로 집단을 극단적인 테러리스트 집단의 기질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국무성은 CIA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한 집단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공작을 하도록 권유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납치 테러의 극단적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혁명 직후 3개월간 카스트로가 보인 일련의 행보였다. 그는 바티스타 정권의 관리들 521명을 인민재판식으로 처형해 재판에 참석했던 미국의 웨인 모스 상원의원이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피의 숙청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쿼크 1993, 225). 또한 그는 향후 선거 일정을 명시하는 것을 거부해 향후 쿠바의 진로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카스트로 혁명에 대한 낭만적 기대감으로 들떠 있던 '뉴 리퍼블릭'(New Republic)같은 미국의 진보적 잡지들마저 카스트로나 게바라가 과연 민주적 지도자인지 의구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Blight et all 2002,8).

***카스트로 방미 외교의 구호 "쿠바는 '동막골"?**

이렇게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카스트로의 방미는 의구심을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절호의 행운이었다. 이를 행운이라고 부르는 것은 방미라는 어려운 결정이 이뤄진 것이 미국이나 쿠바 정부가 주도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가 취임하자마자 자신을 자극적으로 공격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혹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돼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불쑥 정상회담을 제의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신문편집자협회의 초청은 미국, 쿠바 양 정부의 부담을 덜어준 절묘한 기회였다. 카스트로는 이 절묘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미국의 홍보회사까지 고용하고 그의 성마르고 천박한 이미지 개선을 위한 이미지 컨설팅까지 미국 홍보회사로부터 받았다(쿼크 1993,229).

하지만 방미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보다는 그가 혹시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벗고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특히 카스트로가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는 것은 1954년 미주기구 대표회의의 카라카스 결의안(Caracas resolution)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의 중요한 기로였다. 이 결의안은 미국의 주도 하에 남미 대륙에서 공산주의 전초기지의 성립에 대한 공동 행동을 결의한 것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린외교 이래 불개입주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게끔 구실을 주는 절묘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새로이 성립해 아직 정권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카스트로 입장에서는 미국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 혁명의 생존의 문제였다 (Fursenko and Naftali 1997, 9).

이러한 의혹을 불식하는 작업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비록 카스트로는 방미 첫날부터 집요하게 공산주의와의 관련성을 취조하듯이 묻는 기자들과 하원의원들의 추궁에 홍보회사의 충고도 잊고 특유의 괴팍한 성미를 드러냈지만, 단호하게 부인하는 것에는 어쨌든 성공했다. 아울러 그는 그의 동생의 공산주의 성향에 대한 기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NBC 텔레비전의 밋 더 프레스(Meet the Press) 에 출연해 단호히 부인했다. 더구나 그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다음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독재체제에 반대한다. (…) 이것이 우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다."

카스트로는 한편으로 이렇게 공산주의적 인상을 불식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쿠바 내 미국인 자본에 의한 기업 등을 몰수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자 했다. 그는 마치 동막골 영화 광고 문안을 연상시키듯이 "쿠바로 오라! 문은 열려 있다. 세계의 어떤 다른 곳에서도 이만큼 행복하고 희망과 낙관으로 가득한 국민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호소했다(쿼크 1993, 231).

하지만 이러한 카스트로의 성공적이고 떠들썩한 홍보 전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보인 반응은 다소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강경한 보수주의자인 닉슨 부통령은 그와의 단독 회담에서 빠른 시일 내에 선거를 진행하라고 재촉했고, 비록 카스트로의 유화적인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공산주의적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따라서 회담 후 양자의 성명은 다소 미적지근한 표현인 '우호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러한 아이젠하워 정부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당시 상원의원이던 케네디는 미국이 좀 더 카스트로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함을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비판했다.

"만약 미국이 이 전투적인 젊은 혁명가의 승리의 순간이나 특히 방미 중에 보다 더 따듯한 환대를 했다면, 혹시 이 야구광인 젊은 지도자가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Rothkopf 2005,81).

물론 당시 케네디 의원의 지적에는 일말의 진리가 숨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케네디는 당시 카스트로가 취한 이중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근 해제된 소련의 기밀 자료들이 증언하듯이 이 당시 그토록 강력히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부인하던 카스트로는 다른 한편으로 비밀 공산당원인 동생 라울의 주도로 비밀스럽게 소련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아 남미 대륙 전반에 공산주의 혁명을 수출하려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혁명을 수출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발을 묶어 쿠바 침공을 할 여력을 없기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정반대로 미국이 쿠바 정권 교체를 추구할 가장 강력한 명분을 제공해준 셈이다.

***쿠바 판 9.11 테러, 그리고 미국과의 갈등의 고착**

향후 미국과 쿠바 간의 대결을 보다 고착화시킨 결정적 계기는 60년 3월 하바나 항에서 발생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폭발 사고였다. 1960년 3월 4일, 화물선 라 쿠브르 호가 다량의 화약을 싣고 정박했는데 이 배가 실은 폭약들은 미국 등지로부터 무기 구입의 길이 막힌 카스트로가 프랑스, 벨기에 등지의 유럽으로부터 구입한 것이었다. 보통 무기류를 다루는 선박은 안전조치 상 항구에서 떨어진 앞바다에 닻을 내리게 하는 것이 표준절차인데 무슨 이유인지 이 날은 사무실 빌딩이 인접한 항구 안쪽 깊숙이 정박됐다. 결국 폭발로 승선한 사람들과 부두에 인접한 사람들을 포함해 100여 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카스트로는 즉각 이 사건을 제2의 메인호 사건으로 규정하며 미국의 공작이라고 선언했다. 메인 호 사건이란 과거 1898년 미국이 쿠바 항 근처에 정박한 배에서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 조치를 빌미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결국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를 보호령으로 획득한 사건을 말한다. 사실 카스트로의 의구심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벨기에에 있는 쿠바인들은 여러 번에 걸쳐 미국 영사와 무관이 무기 선적을 방해하려고 했다는 소식을 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쿼크 1993,281).

하지만 카스트로의 메인 호 사건에 대한 비유에는 다소간의 아이러니가 있었다. 왜냐하면 메인 호 사건의 의미는 미국이 명확한 증거도 없이 폭발을 스페인의 짓으로 단정하고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는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미국의 혐의는 의심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면 대결을 선언한 카스트로의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미국의 과거 행위와 무척 닮아 있었다.

결국 카스트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례식 연설에서 과거 자신의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들과는 수위를 질적으로 달리하는 강한 반미적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는 심지어 핵폭발의 버섯구름을 향해 행진할 수 있는 민족이다"(ibid., 282)라고 선언하며 전쟁을 전제로 결사항전의 의지를 확인했다.

한때 하버드 대학 입학원서를 제출했던 청년이 북한과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반미적인 나라의 지도자이자 폭정의 전초기지의 우두머리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쿠바와 미국은 피그스만 침공 사건을 거쳐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클라이맥스, 그리고 심지어 냉전이 종료된 오늘날까지 수십 년간 상호 적대적 의존의 역사라는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다.

***만약 카스트로가 하버드 입학 허가서를 받았더라면?**

어떤 이들은 우스개 소리로 만약 하버드 대학 입학사정관이 유학 시절의 카스트로를 입학시켰다면 역사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극도로 늙고 노쇠한 카스트로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서 어떠한 생각에 잠겨 있을까? 그는 하바나에서 열린 '쿠바 미사일 위기' 평가를 위한 국제회의에 예상을 뒤엎고 참여해 모두를 놀라게 한 바 있다.

미국측 인사들을 더 충격에 빠지게 한 것은 그가 장황한 선전전 대신 자신의 지나친 군사주의적 대응을 솔직하게 비판한 바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태백산맥이란 영화에서 인텔리 출신 빨치산 두목이 "어디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라고 회한에 잠겨 되뇌듯 고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금 6자회담이 재개되는 시점에 카스트로와 비슷한 적대적 상호의존의 역사를 지속시켜 온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까? 그는 동막골 영화를 구해 보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이로부터 무엇을 읽어냈을까? 그는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 매니아답게 자신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북미연합군 발상을 영화로 옮기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동막골보다 더 통 큰 '광폭 정치' 구상을 하고 있을까?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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