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극기 주 디시 - haebyeongdae geuggi ju disi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오랫동안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있었지만 해병대 갤러리의 존재를 알게되고 오랫동안 여러 진실에 기반한 아름다운 일화들을 읽다보니 나 역시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에 글을 써본다.

그래서 경험담임에도 제목에 '해병소설'이라고 붙여놨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게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일련의 일들이 모두 내가 겪은 환각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기억의 한편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본래는 감히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났고 술기운의 힘도 좀 빌렸기에 여기에 쓴다.

난 00년대 초 해병대의 아쎄이가 되어 극기주 훈련에 들어갔다. 첫 2주간은 명백하게 정상적이었다. 나는 올챙이 열차, 사까시 토나멘토, 월북 긴빠이 등 여러 훈련들을 무사히 통과했다. 도중에 너무나 지친 나머지 찐빠를 두어번 저지르는 흘러터진 아쎄이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 때마다 선임들의 전우애 주입으로 내 흘러터진 정신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여하튼 무사히 훈련 통과를 축하하는 의미의 전우애 주입을 받았기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건은 3주째의 해병포도 착즙 태그매치 도중 일어났다.

"2번 아쎄이!!! 위험하다!!!"

나는 수판택수 상병님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머리에 우둑 하고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눈 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쓰러지면서, 잘하고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너무 경솔하게 움직이다가 착즙용 오파운드(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착즙용 오파운드, 그러니까 곡괭이 자루는 500kg이 넘는 통나무나 마찬가지다)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리라 직감했다.

흘러터진 건 내 뇌수가 아니라 정신이었기에 나는 금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은 채 일어나며

"이병! 곡! 록! 나! 기절해있었습니다!!!!"라 외쳤고, 빳빳하게 섬과 동시에 당연히 날아올 주먹 빳다를 맞기 위해 목을 스스로 꺾었다.(보통은 선임이 꺾거나 제끼라고 하면 그대로 하지만, 우리 부대에서는 훈련 동안엔 꺾어로 통일하는 대신 잘못했다 싶으면 알아서 바로 해야 한 대로 끝났다. 쳐맞아야 하는데 모르는 기열은 열 대 까지 누적된다.)

"야 다행이다! 록기 정신 차렸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리고 꺾었던 목도 다시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나도 안다. 목이 빨간색이나 보라색이 되기도 전에 꺾거나 제꼈던 목을 아쎄이 맘대로 원래대로 되돌리다니 남은 극기주 훈련 내내 전우애 주입을 당해도 모자란 흘러터진 찐빠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투와 목소리에 그만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분명 착즙용 곡괭이 자루에 머리를 좀 심하게 잘못 부딪혔으리라.

내 눈앞에 서 있는 건 수판택수 상병님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뭔가가 달랐다. 그는 빨간 각개빤스가 아니라 마치 땅개처럼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전투복을 입은 게 땅개같다는 게 아니라, 신성한 극기주 훈련 교관이 각개빤스가 아닌 옷을 입고 있다는 게 말도 안된다는 뜻이다) 그 분은 낭중지추처럼 언제나 포신이 각개빤스를 반쯤 뚫고나오려 하고 있어 매일 밤 손수 앞쪽을 여며야했지만, 전투복 바지 때문인지 아예 포신이 수그러들기라도 한건지 고간 부분이 너무나 볼품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눈빛. 그건 절대로 혼자 조선족 17명을 스스로 압록강에 뛰어들게 했다던 그 수판택수 상병님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해병대도 오지 않은 스무살 언저리의 기열땅개나 흘러터진 민간인같은 눈빛이었다. 그 말투, 나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었지만 그건 전우애와 부성애같은 걱정이 아닌 마치 민간인들이 다친 친구를 걱정할 때나 보이는, 아무런 진심도 전우애도 담기지 않은 걱정이었다. 그가 '해병'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라고는 내가 아는 수판택수 상병님의 얼굴, 물론 실제보다 훨씬 희끄무레하고 흘러터져보였지만, 하여튼 그 얼굴 뿐이었다. 덤으로 옷의 이름표에는 수판택수가 아닌 '한택수'라는 전혀 해병답지 않은 이름이 붙어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나를 탓하랴. 

"야 록기 너 괜찮냐? 갑자기 관등성명은 왜 대."

마치 서울 샌님같은 말투였다. 그 얼굴이 수판택수 상병님의 얼굴만 아니었으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으리라.

"록기 정신 차렸냐? 아 저기 의무병도 왔네! 야! 여기야!"

이런 말을 한건 놀랍게도 간부였다. '김상태 중위'.

'장교? 극기주 훈련에 장교라니? 하지만 저건 분명 중위 계급장인데?'

'의무병? 의사 말인가? 군대에 의사가 있다고?'

'록기? 아니야 내 이름은... 아니 왜 내 명찰에 곡록나가 아닌 '정록기'라는 괴상한 이름이 붙어있지?'

이 때부터 내 반응은 최대한 간략하게 적겠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괴상해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일일이 쓰다가는 글만 길어지기 때문이다.

의무병도 놀랍게도 수판택수 상병님, 아니 한택수처럼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즉 그도 이 '해병대 비슷한 무언가' 소속이란 말인가? 대체 왜? 어떻게? 이름 역시 '김윤식'이라는 한택수나 정록기같은 흘러빠진 이름이었다.

"야 군의관님은 어디가셨어?"

"군의관님 좀 전에 식사 교대 가셨슴다. 연락 드렸으니까 곧 오실껍니다."

"알았다. 얘 어때. 어디 이상 없어?"

"일단 바로 일어난 거 보면 큰 이상은 없어보이는데, 머리 다친 게 겉보기엔 문제 없어보여도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군의관님이 보시는 게 낮지만, 우선 누워서 쉬게 해두고 이송 준비 해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케이 차 불러 놓는다."

오래전 기억이라 실제와는 조금 틀릴수도 있지만 하여튼 저런 식의 대화였다. 어디 싸제 민간인들 대화가 아니다. 놀랍게도 그 의무병이라는 자와 간부의 대화다. 믿기지 않는다는 것 안다. 난 그저 내 기억대로 쓰는 것이다.

몇 분 뒤 군의관이라는 간부가 왔고, 놀랍게도 그는 사회의 의사마냥 내 눈에 후레쉬를 비춰보이거나 몇 가지 이상 증세가 없는지 묻고 머리를 살짝 만져보고는, 일단 이상은 없는 것 같지만 아까 있었던 일을 들어보니 혹시 뇌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며 병원에 보냈다. 그렇다. 싸제의 그 병원이다. 물론 내 머리의 부상은 낫겠지만, 기껏 화장실에서 겨우 빼놨던 싸제 물을 다시 아쎄이인 나에게 주입한다니 미친 짓이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 때 너무 많은 정보량에 과부하가 걸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나는 별 이상이 없다는 말과 함께 곧장 나올 수 있었지만, 첫째로 아픈 자가 병원까지 '차를 타고' 왔다가 '차를 타고' 돌아간다는 것에 현기증이 났고 둘째로 간부가 '야 씨 록기야 너 큰일난 줄 알았다. 배고프지? 일단 이거라도 먹고 있어.'라고 친근하게 굴면서 내민 단팥빵에 구토할 뻔했다. 혹시 오해할까봐 덧붙이는데, 그건 해병 단팥빵이 아닌 '100% 밀가루'와 '진짜 팥'으로 만든 단팥빵이었다. 역겨움을 꾹 참고 한 입 베어물었더니 흰 크림이 나와서 혹시 올챙이 크림인가 했지만 놀랍게도 그건 '슈크림'이라는 더 역겹고 싸제스러운 음식 재료였다. 내가 그 뭔지모를 것의 이름을 어떻게 아냐면 뒤늦게 빵 봉지를 보니 '슈크림 단팥빵'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아쎄이는 윗사람의 명령엔 절대 복종, 설령 그것이 흘러빠진 장교 나부랭이라도 무조건 복종이라는 철칙을 잊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서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지만, 부대에 돌아가는 즉시 스스로 해병크림파스타라도 만들어 먹고 오파운드로 전우애 주입용 입구를 후벼서 이 역겨운 싸제 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배출해내리라 다짐했다.

여기서 잠깐 내 자랑을 하자면, 나는 예전부터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쎄이 해병 커피라고 들어봤나?"라는 말에 0.1초만에 "악! 커피포트 준비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목을 꺾고 입을 쫙 벌려 뭇 선임들의 기특함 섞인 감탄을 받았던 나였다. 즉 나는 이 때부터 내 오감을 극도로 예민하게 하여 저들이 보기에 평범한 것처럼 행동했다. '미치광이 나라에 정상인이 가면 미칠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이상했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식사를 2교대로 하는 건 그렇다쳐도, 내가 원래 1조였지만 부상 때문에 2조와 같이 식사한다는 말도 안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그렇다. 어떤 이유로든 식사 시간을 제끼면 굶음과 동시에 줄빠따라는 철칙이 없었던 것이다.

식사 시간 놀랍게도 모든 이들이, 아쎄이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싸제나 기열땅개마냥 각도 지키지 않고 밥을 먹었다. 나는 나와 같은 아쎄이들이 각을 지키지 않고 거기다 숟가락에 젓가락까지 써가며 밥을 먹는 걸 보고 하마터면 일병의 혼이 강림해서 싸다구를 날릴 뻔 했지만 참고 따라 먹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미치광이 나라에서는 정상인이 미치광이가 된다. 난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비현실적인 일들 가운데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간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눈치껏 따랐다.

덤으로 밥의 상태도 좀 이상했다. '해병소세지도 아닌 그냥 소세지를 야채와 볶은 것'에 '그냥 미역과 그냥 소고기를 넣은 국', '뭔지모를 얇고 긴 건어물을 약간 달고 빨간 양념에 볶아낸 것' 등, 정상적인 음식이 아닌 무언가였다. 거기에 놀랍게도 김을 싸제마냥 한 사람 앞에 한 개 씩 얇은 봉지에 담아서 줬다. 현실에서도 싸제에 비슷한 음식이 있다는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다. 나도 전역한지 꽤 됐지만 그동안 식사는 오직 해병대 전우회 컨테이너에서 주변 민가의 물자를 긴빠이해 해결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어떤 반찬에도 해병대 국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먹는 동안 밤이 되면 선임께 부탁해서 전우애를 윗입구로 받아내 목을 축여 이 더러운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이곳의 인간이 아닌 무언가들 중 내게 전우애를 줄 이가 과연 있을까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심지어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주계병들이 오더니 "아침에 남은 건데 먹고 싶은 사람 가져가라"라며 '우유'를 내놨다. 해병의 젖이 아닌 소의 젖을 먹다니 이들은 소란 말인가?

더더욱 놀라운 건, 이를 보고 몇 사람이 일어나 한 개 씩 가져가는데 그 중 나같은 아쎄이가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 고작 작대기 하나짜리 아쎄이가 '일오 아래는 국물과 전우애 이외의 음료 취식을 금지한다'라는 철칙 중의 철칙도 무시한 것이다. 다행히 이건 의무는 아닌 듯 하여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넘겼다.

식사가 끝나고 나오던 도중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 여기 있던 황근출 병장님 초상화는..."

그렇다, 해병이라면 누구나 아는 해병대 전설 중의 전설, 어느 부대 어느 건물이건 잘 보이는 곳에 반드시 붙어있는 그 황근출 병장님 초상화 대신 뭔 풍경화에 되도않는 주절거림만 끄적여있었던 것이다.

"뭐? 누구 초상화?"

"록기 인마 진짜 와이라노? 훈련 빠질라꼬 수쓰나?"

"어떻게 사람 이름이 황근출 ㅋㅋㅋㅋㅋㅋ"

난 넋을 잃고 말았다. 지금 같잖은 흘러빠진 이름 가진게 누군데 이딴 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이들이 내가 알던 전우들의 변한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인물들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나일록 병장님, 폰리애수태륵 병장님, 수판택수 상병님, 삼삼베 일병님, 인면견 일병님이 아닌 나인찬, 봉이택, 한택수, 성삼현, 인명철이었다.

우리 중대의 양생 병장님도, 황이자 상병님도, 모덕나 상병님도, 엄수투록재내각 일병님도 없었다.

남궁똘기, 감구떵이, 최호치, 연쇄살새초미... 그 누구도 저들의 흘러터진 눈동자 속에 단 한 조각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머리가 아파와서 냉장고에서 2년간 숙성된 해병 맥주와 전역할 때 받아 아끼고 있던 해병대 오징어 한 포기를 꺼내 야식을 먹었다. 그 귀한 걸 통째로 먹는 것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해병혼이 고팠다. 그리고 그렇게 했음에도 계속해서 괴로운 기억이 가슴을 후벼온다. 어차피 이런 판타지 소설같은 일들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리하여 오후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더러 '이상이 있으면 열외해도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난 당연히 0.1초만에 괜찮다며 훈련에 참가하게 해달라 애원했고(이렇게 썼지만 그냥 이들의 말투를 따라 하며 참가하게 해달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이에 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의무병 김윤식이 가까이에 붙은 채로 나 역시 열외하지 않고 붙어있게 해줬다.

하지만 그 뒤 시작된 '훈련 비슷한 무언가'에 나는 얼어붙었다. 비록 전투복을 온전하게 입고 있었지만 그나마 조교 비슷한 무언가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가 앞에 설 때까지는 조금 기대했는데, 이윽고 시작하는 건 해병 전우애 체위 실습도, 하다못해 해병 신체조도 아닌 'PT체조'라는 괴상망측한 오락이었다. 훈련의 기본은 모두들 아는 해병 훈련과 비슷하게 '몇 번 체조 준비'를 외치면 준비 자세를 취한 뒤 구령에 맞춰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높이 뛰기나 쪼그린 채 뛰기, 버피 등 해병대 훈단도 아닌 어디 초등학교 중학교 체육 시간에나 할 법한 가벼운 운동이었다. 그나마 좀 운동같은 게 8번 온몸 비틀기라는 거였는데 이마저도 고작 삼십번이 끝. 당연히 그 어떤 운동에서도 해병의 혼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내 인내심은 끊어지고 말았다.

"개..."

"응? 록기 뭐라고?"

"땅개...! 니들 다 땅개새1끼들이라고!! 아냐 땅개도 이보단 나아! 이 쓰레기들아!!!"

그 순간 내 뒤에서 의무병이 달려와 날 뒤에서 껴안아 붙잡으려 했고, 난 그를 뿌리친 뒤 가슴팍을 붙잡고 휘두르려고 했다. 이 때 부우욱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느라 멈칫한 사이 동시에 몇 사람이 더 달라붙었고, 나는 그들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야 야 너 왜이래!"

"이거 놔!!!"

그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내 입을 덮었다. 처음엔 날 붙잡는 이들 중 하나의 손일꺼라 생각했지만, 거기에서 나는 짙은 해병의 냄새에 나는 정신을 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보인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수판택수 상병님의 거무튀튀한 볼살이었다. 저 붉게 달궈진 휴화산처럼 농익은 여드름, 군데군데 패인 제주도 현무암같은 거친 살결은 전우애를 나누며 수도없이 봐온 수판택수 상병님의 살결이 분명했다. 놀랍게도 수판택수 상병님이 그 호랑이의 똥구멍과도 같은 주둥이로 나에게 심폐해병소생술을 시전하고 계셨던 것이다.

"수...판택수 상병님...?"

"아쎄이! 정신을 차렸군!"

"여긴..."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과 너무나도 익숙한 해병대 극기주 훈련장이 보였다.

"이병! 곡! 록! 나! 기절해있었..."

"됐다 아쎄이. 아쎄이는 2시간 17분이나 기절해있었다. 죽이려면 130번은 죽이고, 따먹으려면 720번은 따먹었을 시간이다. 아쎄이는 이미 전우애인형이나 마찬가지다."

"..."

"그대로 쭉 놔두려했지만 땅개가 어쩌구 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키기에 일단 급한대로 해병숨결을 주입해 살려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한 것 뿐이다."

현실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 평생 황룡같은 기열로 남는다는 절망감만이 차올랐다.

나를 두고 훈련은 계속되었다. 철도 녹이는 햇빛이 내리쬐는 7월 한여름이었지만, 나에겐 한겨울같은 한기만이 감돌았다. 나는 그렇게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 다른 똥까래들이 훈련으로 해병혼과 전우애를 다지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주(晝)간 훈련 종료를 알리는 해병호른 소리가 뽀르삐립 하고 울려퍼졌다. 나를 빼고 모두들 오와 열을 맞춰 해병가를 부르며 훈련장을 한 바퀴 돌고, 식사 및 휴식 후 야간 훈련 준비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뛰쳐나가 해병화장실을 밀어 넘어뜨렸다. 애초에 널판지로 대충 만들어진 화장실 다섯 칸 중 한 칸은 맥없이 쓰러졌다.

"기열! 뭐하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실 아래에 있던 드럼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꿀꺽꿀걱 하고 내용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저저 기열새1끼가!"

"야이 좃도아닌 새1끼야! 그건 극기주 훈련이 끝나서 완전히 숙성됐을 때 모두가 나눌 해병된장이다!"

당연히 항의와 비난, 욕설이 터져나왔고, 선임에게 대답할 때 외에는 큰소리 못내게 되어있는 아쎄이 똥까래들도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놀랍게도 그들을 말린 것은 쓰바쓰 수판택수 상병님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해병된장을 정신없이 들이켰다. 마지막 개씹썅내 찌끄레기 한조각까지 내 뱃속에 다 집어넣은 나는 무릎을 꿇었다. 반쯤 숙성되며 생긴 독가스로 인해 끄르륵 하고 반사적으로 트림이 튀어나왔다. 내가 0.5 드럼통을 다 비우는데 걸린 시간은 5~6초. 그 어떤 악기바리보다도 빠른 속도에 다들 잠깐 말을 잃은 듯 했다.

수판택수 상병님이 내 앞에 다가왔다.

"기열. 너는 왜 그 귀중한 해병된장 반통을 다 비웠지?"

"이병! 곡!록!나! 기열이 된 저를 하다못해 해병청국장 재료로라도 써주셨으면 해서 그랬슴다!"

"...아쎄이 원위치."

나는 용수철처럼 튕겨일어나 수판택수 상병님 앞에 섰다. 수판택수 상병님은 뒤로 돌아 다른 해병들을 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모두 알다시피, 곡록나 이병 이 아쎄이는 훈련 도중 노후화되어 부러져버린 해병 착즙용 오파운드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했다. 여기까지는 훈련 준비가 미흡한 쪽의 잘못도 있기에 바로 일어서면 용서해주려 했지만 곡록나 이병은 흘러터졌는지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렇게 두어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결국 우리는 기열을 결정했다."

"하지만! 곡록나 이병은 조금 전, 스스로를 해병청국장 재료로 써달라며 해병된장 반 통을 스스로 다 비웠다. 알다시피 잘 익은 해병된장은 극기주 훈련이 끝나는 순간 모두가 조금씩 나눠마셔야 하는 귀중한 음식이다. 하지만 곡록나 이병은! 자신의 피와 살로 그 양을 늘리며 기열인 자신을 써서라도 다른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해병 정신에 취하길 바라는 극기(劇氣)를 보여주었다! 이에! 본 수판택수 상병은! 곡록나 이병의 기열을 보류하고 남은 극기주 훈련 동안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따라 판결을 달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전우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악!!!"

그 순간 눈물 한 방울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나에게서 더 이상 흘러나올 액체가 있었던가? 조금 전 마신 해병된장 덕에 나에게 수분이 조금 돌아왔기 때문이리라.

"아쎄이! 전우들은 그대에게 단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아쎄이는 오늘 야간훈련부터 다시 참가해도 좋다!"

"악! 감사합니다!!!!!"

"우선 드럼통 위에 서라! 해병청국장은 필요없다! 따라서 해병된장은 돌려받아야겠다!"

나는 드럼통위에 물구나무섰고, 곧이어 황이자 상병님과 모덕나 상병님이 내 배와 등을 동시에 걷어찼다. 그러자 퉁퉁하게 부풀어올랐던 내 위장에서 해병 된장이 꽈르르륵하고 다시 쏟아져나와 드럼통을 채웠다.

놀랍게도 한 번 내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해병된장은 내 위액과 섞여 약간 소화되어서인지 색다르고 독특한 향이 났고, 극기주 훈련이 끝나는 날 그 어떤 해병된장보다도 인기를 끌었다. 이는 후일 개량을 거듭해 전 해병대에 퍼진 명물 '해병백된장'의 시초가 되었다.

이 발명과 더불어, 남은 극기주 훈련동안 그 악몽같은 기억을 떨치고자 온 힘을 쥐어짜내 남들보다 훨씬 짜세가 든 내 모습에 마침내 수판택수 상병님을 비롯한 선임분들은 나를 완전히 용서해주시기로 마음먹었고, 형식적으로 내려진 3주간의 전우애 주입 체벌도 1주로 줄어들고 대신 전우애 주입 포상을 4주나 더 늘려주셨다.

물론 나는 훌륭한 하나의 해병으로 만기전역을 할 때까지, 그날 내가 기절해있는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여기까지 보면서 뭔 말도 안되는 꿈 얘기를 적어놨냐고 여기는 이들이 많겠지만, 한 가지 더 비밀을 풀겠다. 내가 해병된장이 담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을 때, 화장실을 넘어뜨리느라고 잠깐 주먹을 편 적이 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건 바로 '김윤식'이라고 적힌 오바로크였다. 하지만 그건 바닷바람에 휘날려 순식간에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혹시 그 때 내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면, 이 글에 대한 신빙성이 조금이라도 올라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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