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장 설교 - sadohaengjeon 28jang seolgyo

지난 주에는 배가 파선되어 멜리데 섬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일어났던 사실들을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섬에 발을 디딘 276명은 섬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 주었던 친절과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이 그 많은 사람을 다 자기 집에 초청하여 3일이나 친절히 대접해준 사실과 이런 친절의 보상으로 모든 병들을 낫게 해주었던 일, 그리고 독사에 물린 바울과 이로 인해 바울이 특수한 사람임을 알게 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로마에 있던 성도들이 20마일, 30마일까지 마중 나와줌으로 바울이 크게 격려 받았던 일을 통해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로마에 도착하여서의 바울의 전도활동을 통해 교훈 받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인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 뜻을 발견하고, 바울의 전도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1]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첫 모임(16-22)

[2]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두 번째 모임(23-28)

[3] 셋집에서 2년간 하나님 나라를 전파(30-31)

[1]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첫 모임(16-22)

우리 한글성경에는 없지만 다른 성경판을 보면 16절에 백부장이 경비대장에게 넘겼고 바울은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유하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백부장은 떠났고 이젠 로마의 시위대 경비병 한 명씩 교대하면서 바울을 지키되 다른 죄수와 함께 있지 않고 바울 혼자만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과대한 대우가 주어졌을까요? 틀림없이 벨릭스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의 편지에 이 사람을 죽일 죄나 또 묶어둘 죄목이 없는 자라고 썼기 때문일 것이고, 또 배가 파선되었으나 276명의 생명을 건져준 바울의 지도력을 백부장이 잘 보았으므로 백부장의 특별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여 감옥에 있지 않고 셋집을 얻어 생활하도록 허락되었으니 요사이 가택연금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3일 동안에 셋집이 정리가 되었는지 3일만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바울로서는 로마에 오고 싶어했던 목적이 복음전도였으므로 이곳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으면 전도가 어려우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같이 어떤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대인 지도자들을 자기 셋집에 정중하게 초청하여 자기의 된 일을 변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란 대개 회당의 지도자들로, 이 로마에는 6-7개의 회당이 그 당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초청하여 자기가 이곳까지 죄수의 몸으로 온 것은 내가 우리 조상의 어떤 것도 범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나를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주었고, 오히려 로마인들은 나를 심문해도 죄가 없으므로 풀어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이니 행여라도 내가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나는 우리 정통 유대인들이 갈망해 오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부활의 소망 때문에 내가 쇠사슬에 매여있다고 자기를 설명하게 됩니다.

그때 유대인 지도자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누구의 편지도, 연락도 공식적으로 받은 바 없으므로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바울로서는 참 다행이었습니다. 나쁜 편견이 없는 그들에게 마음 편하게 전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두 번째 모임(23-28)

유대인 지도자들은 제2차 모임의 날짜를 정하고 다시 많이 찾아왔으므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되 예언서에서와 모세의 율법에서 이미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더니 반응이 두 가지인데,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갈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해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이 뜬 것 같아도 감았고 그 귀는 듣기에 둔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으로 책망하며, 이렇게 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섭리를 예고해줍니다.

이곳 로마에서도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는 우선 순위를 택하나 그들의 불신으로 이젠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29절이 본문에는 없으나 밑에 작은 글씨로 있지요. 참고로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쟁론을 하며 물러가더라.” 서로 의견 충돌이 자기들끼리 생겼다는 것이지요.

[3] 셋집에서 2년간 하나님 나라를 전파(30-31)

바울은 로마에 와서 2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는 동안 재판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맞아들여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으나 이를 막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기록해줌으로 사도행전을 마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사도해전 마지막 부분에서 무슨 교훈을 얻게됩니까? 우리 각자에게 어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저에게 들린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립니다.

첫째, 환경을 탓하지 않는 바울의 전도사명입니다.

바울은 옥에 갇혀있는 동안 편지 4통을 썼는데,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를 썼거든요. 그후 또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를 썼는데 모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요. 7개가 로마 옥에 있은 이후의 일이어요. 그는 옥에 갇혀있는 초기엔 엡 6:18,20, 골 2:2,3에서 보듯이 내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는 기도해달라고 에베소 교회 교인들,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기도부탁을 했는데, 빌 1:13,14에 보면 “나의 이 매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기록이 되었고, 빌 4:22에서 문안하는 사람들 중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라고 하였으며, 그의 빌레몬서를 보면 오네시모가 바울의 전도 받고 개종한 것을 보게되므로, 바울은 옥에 갇힌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아니 군인이 한 손에 바울의 한 손이 쇠사슬에 매여있는 그런 환경에서도 전도방법을 찾던 중, 자기가 갈 수 없는 몸이므로 사람들을 초청전도하기 위해 셋집을 얻어 전도하게되므로 자기 손에 쇠사슬에 매여있는 군인들이 매 3시간마다 교대하게 되는데 그들은 계속 바울의 전도를 듣게되고, 자기들이 들은 이야기를 또 다른 군인에게 전하게되어 최소한 몇 군인들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또 심히 천한 신분인 오네시모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보면 신분이 높던 낮던 넓은 분야에서 전도를 했던 환경을 이긴 전도자 바울을 보게됩니다.

여러분의 환경은 어떻습니까?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남의 집에 있어 자유가 없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병들었습니까? 하나님께 의지하면 환경 초월하여 다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바울의 대를 이어 전도사명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마치면서 무척 아쉽고 불안한 것이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9장이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가 29장을 썼다면 바울이 어떻게 재판을 받았든 재판에서 풀려나와 그 다음 어떻게 전도를 했다는 내용이 기록이 될 터인데 그것이 빠졌고, 그 동안 바울과 함께 계속 여행을 따라 다녔던 우리는 그것에 관심이 많은데 그것을 잘 모르니 확실히 알려드릴 수 없는 불안이 저에게 컸던 것입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바울은 일단 감옥에서 풀려났고, 그후 전도여행을 계속했음을 보게되는 것은 디모데전후서에 나와있는 내용 중 사도행전에 없는 것이 나오므로 일단 풀려나서 전도를 하다가 다시 옥에 갇혀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의 핵심은 바울의 재판의 결과에 있을지 모르나, 누가를 통해 기록해 나가신 성령님의 뜻은 어떤 경로를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로마와 스페인과 미국과 한국과 또 온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졌는지, 성령께서 전도자들과 어떻게 함께 하셔 큰 일을 했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29장이 빠져 그렇게도 아쉬웠는데. 이 말씀을 준비하며 29장이 빠진 것에 대해 엄청난 환희를 느꼈고 하나님의 암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침묵하신 일에 인간들이 크게 관심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심, 정력 쏟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 29장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써서 바울의 최후를 써도 하나님 편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9장은 하나님 편에서는 바울의 최후를 기록하실 것이 아니고 우리 성도들의 전도사실을 쓰실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끝났으나, 이젠 전도여행 훈련받은 우리는 우리 각자가 전도여행 스케쥴 잡아서 형편 초월해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하여 바울의 대를 이어야한다는 중대한 전도명령이 침묵의 29장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은 끝날 수 없습니다. 계속 진행해 나가며 계속 써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을 우리에게 주시고 강해설교를 1년 이상 하도록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강해설교를 들을 수 있는 청중을 주셨음에 감사드리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환경을 탓하며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시며, 바울의 전도사명을 우리 모두 대를 이어 각자의 자리에서 전도사명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28:16-31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로마로 온 이유(16-20절)]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가 출발한 바울 일행은 마침내 제국의 심장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며 사도행전의 막이 내려옵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황제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에서 증거하듯이, 이때부터 바울은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셋집’은 돈을 주고 빌린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공간적으로는 ‘싸구려 헛간’ 같은 곳이었습니다.

[(17a)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초대한 사람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에는 처음 왔기 때문에 로마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가택연금을 당할 셋집을 얻었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도와주었고, 그들이 곁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흘이 지나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이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일일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7b-19)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2년에 걸쳐서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에게 거짓된 내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굶어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유대교 공동체에 바울을 모함하는 편지를 보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왜 자신이 왜 황제에게 상소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소는 바울이 자기 민족,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이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가택연금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쇠사슬’은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억압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쇠사슬_chain’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이 바울에게 감옥 밖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도, 미결수인 바울이 도망칠 수는 없도록 쇠사슬로 묶어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감옥 밖에서 머무는 미결수에게는 그 미결수의 한쪽 팔과 그 미결수를 지키는 군인의 한쪽 팔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곤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쇠사슬에 매여 있는지에 대해 해명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그 소망,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21-29절)]
그에 대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바울의 변론을 들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험담한 사람도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라 다소 사탕발림이었습니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정보가 빨리 오가던 때가 아니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날 날짜를 정했습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약속한 날짜가 이르자, 바울을 처음 방문했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까지, 많은 사람이 바울이 가택 연금되어 있는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모였습니다.
본문의 ‘강론하다’는 ‘자세히 설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은 ‘구약성경’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심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특히 ‘아침’이라는 말은 ‘새벽’ 또는 ‘동트는 시각’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과 약속한 날이 밝자마자 바울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제가 30대 중반이었을 때, 공산권 국가에서 성경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주일을 가르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 체력은 왕성했음에도, 밤이 되었을 때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고, 지병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에는 쇠사슬도 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경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동일한 목회자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으며 신앙생활 했음에도,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 있지만, 지금 주님과 등지고 있는 사람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25-28)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구원해 주시려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귀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함으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금 생활 2년 요약(30-31절)]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2년 동안 연금되어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했다고 합니다. ‘영접하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고, 바울을 계속해서 그들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사도행전의 막이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때 제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사도행전의 주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꿈꾸고 살아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임하는 곳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행전의 주역입니다.

또 사도행전은 사도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마침내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 3,000명, 5,000명이나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로마제국이 복음화가 되었다든지, 사도들이 다 대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든지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고, 바울도 가택 연금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셨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세상의 나라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변질의 인생이 아니라 변화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이 각자의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두 달여 동안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사도행전과 더불어 말씀의 여행, 믿음의 길을 걷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걷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사람을 통로로 삼아주셨듯이, 이제는 우리 각자가 그 역할로 써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온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부름을 받아서 점점 더 온전하여 갔듯이, 허물투성이인 우리도 그렇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언제나 세상의 나라나 나의 제국을 꿈꾸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를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매일 매일을 각자의 행전으로 엮어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의 인생길은 크게 소명을 받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과 고난을 겪은 ‘예루살렘으로 길’, 그리고 소명을 보여주는 ‘로마로 가는 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는 어떤 길이 있었습니까?
2.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까?
3. 바울은 가택 연금된 셋집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4. 자신의 삶을 사도행전으로 가꾸고, 변화의 인생을 살며,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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