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쳐 헨리 카빌 - wichyeo henli kabil

※ 아직 시청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핵심 스포일러는 피했습니다만, 드라마 줄거리가 어느정도 담겨 있습니다.

‘위쳐’ 첫 에피소드를 감상했는데, 음, 아무래도 나 (헨리 카빌을 보고) 임신한 듯.

I’ve seen a screener of the first episode of ‘The Witcher’ and, um, I think I’m pregnant.

- 프리랜서 작가 ‘Geek Girl’, 시사회 반응 中

다른 사람의 글로 리뷰를 시작하는 게 썩 적절치 않지만 상당히 웃길뿐더러 의외로 본작의 핵심을 꿰뚫는 촌평이다. 헐리우드의 떠오르는 알파메일 헨리 카빌이 주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위쳐(The Witcher)’가 20일 정식 공개됐다. 폴란드 소설가 안제이 삽코프스키의 대표작이자 국내에는 CDPR이 만든 게임 시리즈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위쳐’다. 중세 암흑기를 연상케 하는 혼란스러운 대륙을 무대로, 고독한 괴물사냥꾼 게롤트가 각종 사건과 맞닥뜨리며 점차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과정을 총 여덟 에피소드에 걸쳐 담아냈다.

비록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이름값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위쳐’는 제작 단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동일한 원작을 둔 게임이 세계적으로 수천만 장씩 팔린데다 최근 한창 주가를 올리는 헨리 카빌까지 합류한 덕분이다. 헨리 카빌은 존재감으로 보나 몸값으로 보나 다른 출연진과 확연히 구분되는데, 평소 열혈 게이머로 알려진 그가 적극적으로 의사를 타진하여 게롤트役을 따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도 마침 ‘왕좌의 게임’이 종영하여 에픽 판타지에 목마른 시청자층을 흡수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이제 남은 건 작품을 얼마나 잘 뽑아냈느냐 뿐이다.

여담이지만 대규모 전쟁 장면 위주로 편집된 '위쳐' 최종 예고편은 살짝 낚시 의도가 비친다.

세 명의 주인공, 세 개의 시간, 하나의 운명

CDPR 고유 창작인 게임 시리즈와 달리 드라마 ‘위쳐’는 원작 소설에 충실한 편이다. 금번 시즌 1은 본격적인 모험의 전일담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의 목소리’와 ‘운명의 검’을 기반으로 크고 작은 각색을 더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한 점으로 모이는데, 저마다 시간대가 달라 처음에는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다. 흉측한 곱추로 태어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예니퍼가 와신상담 끝에 강력한 마법사로 각성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며, 게롤트가 여행 와중에 음유시인 야스키에르(단델라이언)와 얽히는 것이 그 다음, 신트라 왕국의 몰락으로 공주 시릴라가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맨 끝부분이다.

이들 세 이야기는 시간순에 따르지 않고 매 에피소드마다 서로 교차하며 진행된다. 뭔가 시청자를 속이려는 서술 트릭은 아니고 주인공 셋을 향한 주목도를 어느정도 균일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가깝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알짜배기 분량, 가령 괴물을 사냥하고 악한을 처단하는 장면은 게롤트가 독식하다시피 하기에 예니퍼와 시리 에피소드를 따로 뺐다면 심히 밋밋했을 것이다. 드라마 내내 강조하는 운명이란 주제를 은유하기에도 이러한 교차 편집은 그럴싸하다. 다만 일부러 분량을 맞추느라 예니퍼는 마법사 승급 이후가 너무 급전개이고 시릴라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도피행이 쓸데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게롤트는 정령의 소원으로 예니퍼와 운명을 묶었고, 시릴라는 운명의 아이다. 세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될 운명.

액션이든 섹스든 '위쳐'에서 기대할만한 것들 대부분이 게롤트 분량이다. 교차 편집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 셈.

이외에도 작중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 없다시피 하다. 아무래도 “전란의 시대, 여기 하얀 늑대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그는 전문직 괴물사냥꾼으로 어쩌고 저쩌고…” 같은 인트로는 촌스럽다고 여긴 모양이다. 천구의 합부터 아레투자, 케어 모헨 등 고유 명사가 꽤 나오는데 딱히 누군가의 입을 빌어 해설하지도 않는다. 다행히 이야기 전개 자체는 직관적이라 ‘펄스의 팔씨의 르씨가 코쿤에서 퍼지’하는 수준은 아니고 뜻을 몰라도 그럭저럭 납득할 만하다. 뜬금없이 닐프가드가 거무튀튀하고 주름진 번데기 갑옷을 걸치고 악의 제국군 노릇을 하는 것도 이러한 직관성의 일환인 셈. 물론 세계관 설명을 건너 뛴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를 볼 정도면 소설이든 게임이든 ‘위쳐’에 대한 최소한의 배경 지식이 있으리란 판단 때문이겠지만.

물론 케어 모헨이 뭔지,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행히 이런 대사쯤 놓쳐도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

닐프가드의 전위적인 복장은 별다른 부연 없이도 누가 악의 제국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과할 정도로.

극을 견인하는 게롤트, 보조를 맞추는 예니퍼

그러면 세 주인공을 한 명씩 살펴보자. 헨리 카빌이 호연한 게롤트는 단연 드라마의 격을 높여주는 존재다. “더 큰 악과 작은 악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다”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관철하는 고독한 괴물사냥꾼.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자 일각에선 헨리 카빌 특유의 느끼한 눈빛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나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185cm가 넘는 근육질 거구는 사람들이 왜 위쳐를 두려워하는지 명확히 보여주며 간간히 흘리는 눈빛도 예니퍼와의 로맨스를 더욱 야릇하게 만든다. 춤추듯 작렬하는 검격과 아드 표식을 쏘는 힘찬 손짓까지 모든 액션이 흠잡을 데 없다. 특히 헨리 카빌은 작중 그 누구보다 게임 시리즈를 의식한 연기를 펼치는데, 성우 더그 코클의 중후한 목소리를 거의 똑같이 낸다. “흠…”

헨리 카빌은 진짜 게롤트 본인이 포탈을 타고 헐리우드로 왔대도 믿을 정도. 틈만 나면 "흠…"을 시전한다.

예니퍼役 안야 차로트라는 흉측한 곱추에서 고혹적인 미녀를 아우르는 여러모로 난해한 연기를 소화했다. 곱추 시절에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으나 거친 표정과 동작만으로 세상을 향한 분노와 음울감을 잘 드러낸다. 그녀의 연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환골탈태 장면은 처절한 절규와 몸부림에 보는 사람이 다 아파올 정도. 반면 마법사로 승급 후 인물 묘사는 다소 전형적이라 짙은 화장과 야한 의상으로 대변되는 팜므파탈스러움도 별로 와닿지 않는다. 소문난 악녀치고 행동거지도 나름 상식적이고(게롤트를 거의 죽일 뻔하긴 했다) 불임 치료에 집착하게 되는 심경 변화도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 예산의 한계로 인한 어설픈 마법 연출도 감점 요소.

프레야 알란의 시릴라에 대해선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시즌 1에서 시릴라가 하는 일이라곤 계속 도망치는 것뿐이다. 사실 원작에서도 이즈음 시릴라는 존재감이 옅다. 본래 다른 시간대의 사건인 브로킬론 숲 방문을 가져다 붙여 분량이 생기긴 했으나 그냥 기계적으로 다뤄야 하니까 다룬 느낌이다. 이렇다할 내적 성장은 보이지 않으며 그나마 자신을 도우려던 여인의 말을 훔칠 때 야수성을 살짝 내비칠 뿐이다. 시릴라의 본격적인 활약은 시즌 2를 기대해야 할 모양이다. 다행스럽게도 신트라 왕국의 칼란테 여왕과 아이스트 부부, 드루이드 모이스작 등 여러 중견 배우가 괜찮은 연기로 시릴라의 분량을 받쳐주는 편이다.

예니퍼의 서사는 시간 관계상 수십년씩 건너뛰는 터라 충분히 다듬어지지 못했다. 미녀가 된 후 존재감이 되려 떨어지기도.

프레야 알란의 시릴라는 뭔가 평하기조차 애매하다. 여덟 에피소드 동안 보여주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롤트의 멋짐에 가려진 허술한 서사와 CG

시즌 1의 기반이 되는 ‘이성의 목소리’와 ‘운명의 검’은 서로 상당히 시차가 있는 사건들의 모음집이다. 위쳐와 마법사 모두 일반인보다 오래 살며 젊은 모습을 유지하기에 이러한 구성이 가능하다. 드라마 ‘위쳐’ 역시 이를 감안하여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면서도 전후 상황을 조금씩 고쳐 가급적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했다. 소설과 드라마의 문법이 다르다 보니 어느정도 각색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드라마의 기준으로 보면 서사가 뚝뚝 끊기는 감이 있는데,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야 할 시즌 1에서 이러한 인상은 그리 좋게 다가오지 않는다.

소설이기에 뭉개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영상에선 충실히 연출해줄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 ‘위쳐’는 지나치게 안일한 길을 택했다. 여기에 영화보다 예산이 적은 드라마라는 현실적 한계까지 더해져 몇몇 장면이 좀 우스꽝스럽다. 수많은 병력이 자그마한 방어막을 못 뚫어 해가 지도록 화살만 쏘고 있다든가(이때 닐프가드 소속 마법사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패망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해질 때까지 공주를 도피시키지 않고, 추격대가 큰 소리로 “시릴라~”를 외치며 숲을 뒤지는 등 바보짓이 이어진다. 마법에 대한 묘사도 중구난방이라 포탈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마법사가 구태여 위험천만한 절벽 잔도를 걷기도 한다. 후반부 소든 언덕 전투도 마법의 위력과 활용법이 오락가락하는 대표적인 예다.

수색대라는 녀석들이 추적하는 대상을 큰 소리로 부르며 다닌다. 과연 大 닐프가드 제국이 자랑하는 정예병답다. 

와~ 포탈을 활용하여 사격을 하다니 대단해! 근데 포탈이 있는데 왜 공성전을 하고 있냐, 니네들…

판타지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CG는 장면마다 품질의 낙차가 꽤 심하다. 정확히는 게롤트가 액션을 펼치는 부분은 대체로 괜찮으나 나머지는 허섭한 편. 괴물로 변한 아다 공주를 구하고자 분투하는 장면에서 스트리가의 묘사는 여느 블록버스터와 견줄만하지만, 산 정상에서 만난 골드 드래곤은 B급 영화사 어사일럼이 손수 키워낸 듯하다. 그리고 여러 여성의 세미 누드와 신체 절단 및 장기 자랑이 종종 나오는데, 꼭 필요한 경우도 있겠으나 이것이 넷플릭스 성인 드라마다!, 이것이 ‘위쳐’가 자랑하는 다크 판타지다!라고 구태여 주장하는 듯한 장면도 적잖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주제의식이 그다지 성인향이 아닌지라 툭 튀어 보이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젖가슴의 향연을 고맙게 감상하였지만.

전반부에 자리한 스트리가와의 난투는 훌륭한 CG와 액션 연출로 '위쳐'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이지만,

후반부 골드 드래곤의 조악함은 한숨만 나온다. 물론 드라마의 현실적인 한계라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냥 볼만하다는, 위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쯤에서 드라마 ‘위쳐’를 재미있게 본 이들을 위한 변을 하자면, 기자도 이 작품을 여덟 에피소드 내내 즐겼다. 어차피 원작 소설과 게임 삼부작을 섭렵한 입장이니 더그 코클의 목소리로 악을 처단하고 의리를 행하며 여자까지 쟁취하는 게롤트에 환호하면 그만이었다. 사실 그게 문제다. 드라마 ‘위쳐’는 분명 즐길만한 작품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게롤트, 헨리 카빌에게 너무 많이 의지한다. 다소 부실한 인물 형성과 허술한 서사를 헨리 카빌의 존재감만으로 봉합하는 형국이다. 그는 ‘슈퍼맨’과 ‘미션 임파서블’을 찍으며 전문적인 액션 트레이닝을 받은 헐리우드 스타이며 예산 배정에도 엄청난 수혜를 누렸다. 이러니 헨리 카빌이 나오는 장면과 나오지 않는 장면의 완성도가 널을 뛸 수밖에. 당장 게롤트와 맞먹는 무위를 지녔다는 빌게포츠의 후반부 일기토만 보아도 지극히 드라마 수준의 액션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서두에서 불꽃의 임신 위쳐를 언급한 진짜 이유다. 결국 드라마 ‘위쳐’는 Geek Girl의 촌평마냥 “헨리 카빌이 정말 섹시해”에서 끝나버린다. 그야 원작부터 게롤트 없이는 성립하기 힘든 소설인 것은 맞다. 그러나 단편 ‘악이 더 작은 쪽’에서 다룬 도덕적 성찰이나 스코이아 텔, 예니퍼의 어린 시절, 무엇보다 위쳐란 존재로 대변되는 소수자 담론이 ‘위쳐’를 평범한 판타지 활극이 아닌 수작으로 만들어줬다. 금번 시즌 1에도 이러한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깊이 다루지 않는다. 렌프리와의 교감이나 엘프 난민을 이끈 담판은 사족 취급이다. 무슨 판타지 드라마에 주제의식을 따지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드라마 ‘위쳐’가 팬덤 가슴에 못질하는 망작이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우리가 흔히 ‘갓’이라 수식하는 명작 드라마의 대열에 도저히 끼워 넣을 수 없다. 부디 시즌 2에서는 헨리 카빌만큼 작품성도 섹시해지기 바란다.

 트레일러로 잘 알려진 이 고뇌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난 인간이 아니야"라고 분위기나 좀 잡을 뿐.

필라반드렐과의 담판은 황당할 정도로 짧다. 이 드라마가 메시지를 주는데 별 관심이 없는 건 잘 알겠다.

끝으로 민감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드라마 ‘위쳐’는 캐스팅 단계에서 非백인 배우가 다수 합류하여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 넷플릭스는 이미 비슷한 전적이 있으므로 어떠한 의도가 있는 캐스팅이라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상술했듯 원작의 소수자 담론을 뭉텅 잘라내고 오락성으로 채워 넣었다. 정작 이미 존재하는 PC 요소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캐스팅으로 팬덤의 심기만 건드린 셈이다. 애당초 CDPR과 게임이 일군 세계적인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드라마임에도, 뭇 게이머의 기대를 저버리고 ‘빨간 머리’ 메리골드에게 새로운 얼굴을 줬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넷플릭스의 모순적인 행보는 정말로 PC하다기보단 그저 PC스러운 포장지를 두르고픈 얄팍함이 엿보인다. 그 결과는 상업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너무도 ‘위쳐’답지 못한 선택이 되어버렸다.

넷플릭스의 캐스팅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그래서 더 나쁘다. 배우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빠지진 말자.

작성 및 편집: 김영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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