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1905년 이용익 선생이 창립한 학교로 설립 당시 교명은 사립 보성중학교라 칭하고 1905년 9월 5일 대한제국 학부에서 설립 인가를 받아 신해영 선생을 교장에 임명, 신입생 240명을 모집하여 동월 22일 경성 중부 박동 10통 1호(현 수송동 44번지)에 개교한 학교로 현재의 위치인 송파구 방이동 교사(校舍)는 1989년에 준공된 것이다. 같은 재단의 보성중학교와 학교 부지를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운동장도 공유하고 있다. 교명인 ‘보성(普成)’은 고종이 내린 이름으로,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교훈은 ‘스스로 배우고 몸소 행하며 힘차게 앞서자’이다. 100년의 역사를 계승하고 사회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여 새 역사 창조를 주도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고, 민족문화 교육의 지속적 추진, 정통의식 양양과 애국심 함양, 미래지향적 교육 등에 역점을 두고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개교 당시인 1907년에 중등학교 최초의 친목회인 토론회(討論會)를 결성하여 국채보상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3·1운동 당시 교장과 졸업생을 비롯하여 많은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동하고, 학교 구내에 있는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 3만 5,000부와 『조선독립신문』 1만 부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 3·1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주학생운동 당시에도 대대적인 시위와 동맹휴학을 결행하였고, 1931년 식민지교육 반대 동맹휴학 등 지속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6년에는 이러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보성의 종(鐘)’을 주조하여 사각정의 종각에 다는 행사를 가졌다. 체육활동으로는 1940년 전일본중등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하여 광복 전까지 축구·정구·유도·씨름 등에서 여러 차례 전국을 제패한 바 있다. 매년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차전놀이·북청사자놀이 등 민족문화 놀이를 전승시켜 가고 있으며, 전통문화연구반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1908년 6월 친목회인 토론회(討論會)에서 『보성친목회보』를 창간한 바 있고, 현재는 1946년에 창간된 학교신문 『인경』과 교지 『보성』을 정기적으로 간행하고 있다. 1996년『보성 90년사』, 2006년에 『보성 100년사』를 간행하였다. 이용익 선생 창립. 교명을 '사립 보성중학교'라 칭하고, 동년 9월 5일 학부에서 설립인가를 받아 신해영 선생을 교장에 임명하고, 신입생 246명을 모집하여 동월 21일 한성부 중서 박동 10통 1호에서 개교 1910년 천도교 총본부가 본교 설립자가 됨 1913년 교명을 사립 보성학교라 개칭 1917년 교명을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 1924년 1월 5일 재단법인 조선 불교 중앙교무원[3]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27년 5월10일 경성부 혜화동 1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로 교사(교지 3,851평 건평 연와 2층 505평 목조 부속건물 114평)를 신축 이전 1932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와 재단분리[4] 1935년 재단법인 고계학원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교명을 보성중학교로 개칭 1940년 재단법인 동성학원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45년 동성학원 설립자 간송 전형필 선생 제12대 교장에 취임 1946년 6년제 고급중학교로 학제변경 인가.[5] 1950년 5월 1일 신 교육령에 의하여 중, 고 분리 1950년 6월 25일 석조건물 62평 도서관 신축 낙성 개관 준비중 한국전쟁 발발 1951년 4월1일 부산 영주동에 임시연락사무소를 정하여 피란학생 등록 개시 1954년 6월 18일 혜화동 교사로 복귀 1971년 3월 전성우 선생 제20대 교장에 취임 1973년 보성고등학교로부터 보성중학교 분리 1976년 9월 5일 창립 70주년 기념식 거행(과학관을 완공하고 설립자 이용익 선생 동상과 간송 전형필 선생 동상을 제막) 1989년 교정을 종로구 혜화동에서 송파구 방이동(현 교정)으로 이전[6] 1989년 5월 20일 방이동 신축교사 준공식 1996년 3월 2일 김장화 선생 제21대 교장에 취임 1999년 9월 2일 류보일 선생 제22대 교장에 취임 2002년 9월 2일 김갑철 선생 제23대 교장에 취임 2006년 100주년 기념식 및 보성 100년사 발간 2007년 박재현 선생 제24대 교장에 취임 2008년 5월 15일 100주년 기념관 준공 2010년 2월 28일 식당동 준공식 2010년 9월 1일 봉호근 선생 제25대 교장에 취임 2014년 9월 1일 구선일 선생 제26대 교장에 취임 2016년 9월 5일 개교 11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교지를 간행함 2017년 3월 1일 박형송 선생 제27대 교장에 취임 2020년 9월 1일 이상현 선생 제28대 교장에 취임 2021년 제111회 졸업식
3. 교훈 및 상징[편집]3.1. 교표[편집]보성고등학교 普成髙等學校 Posung High School
3.2. 교목 및 교화[편집]교목은 소나무로 소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모든 학교가 그렇듯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푸른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3.3. 교가[편집]
4. 학교 특징[편집]오륜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부지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로변 사거리에 위치[13]하고 있는데다 정면에 올림픽공원[14]을, 후방에 서울 외곽 그린벨트 지역을 마주하고 있어 주변 경관은 상당히 쾌적하다. 사거리의 대각선 건너편에 성내동이 있는데, 고등학생들은 느끼기 어렵지만 여기도 나름 한국체육대학교의 배후 상권지역이다. 5. 학교 시설[편집]운동장에서 본 교정의 모습(2006년)[15]
예전에 식당으로 쓰였지만 식당동 완공 이후부터 매점으로 쓰이는 곳이 강당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정문에서 중학교로 올라오는 길목에 중고등학교로써는 드물게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농구코트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종종 동문회와 결혼식이 열리며 외부인의 강연이나 영어 발표 대회 같은 큰 행사가 열릴 때 학생들이 쓰기도 한다. 사실 100주년 기념관보다는 강당을 더 많이 써서 학생들은 사실상 거의 안 쓴다. 영어 말하기 대회 강당인데?
독서실의 경우 1, 2, 3 열람실이 있으며 1 열람실은 신청자와 1학년 보아반[17] , 2 열람실은 2학년 보아반, 3 열람실은 3학년 보아반이 사용한다. 2, 3 열람실의 경우 칸마다 2단계 기능상실한지 오래로 밝기조정이 가능한 조명과 콘센트가 달려있다. 일반 독서실의 경우 신청제로 운영이 되는데 이용시간을 많이 기재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므로,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가짜로 사용시간을 부풀려 신청하고 찍튀 및 대리출석[18]을 하는 일이 성행하였다만 현재는 신청하면 자리가 나는대로 배정해준다. 보아반 소속 학생의 경우 예전에는 특별히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 한 무조건 자리를 배정해 주었지만, 2014년에는 신청제로 바뀌었다. 2015년에는 교장이 바뀌면서 대격변이 일어나, 전체적인 시스템이 엄격하게 바뀌었다. 게다가 지문인식 시스템까지 도입이 되었다.
학교 운동장이 묘하게 사다리꼴 비스무리해서 축구할 때 경계를 잡기가 애매하다. 현재 육상트랙이 발암물질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없어졌기 때문에, 그전보다 그리기는 쉬워졌다.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만큼 운동장은 항상 비좁다. 옆에 있는 세륜초등학교 부지를 사면 안되냐는 말이 나올 정도. 100주년 기념관이 지어지면서 농구코트가 운동장으로 옮겨가며 더 좁아졌다. 한 번에 4학급씩 나오는 중학교 스포츠클럽 시간이랑 고등학교 1,2,3학년 체육시간이 겹치는 시간에는 한 운동장에 7학급이 있는 장관이 연출된다.
6. 학교 생활[편집]6.1. 주요 행사[편집]
7. 운동부[편집]
구한말 보성중학시절부터 창단되었던 유서깊은 야구부였다. 학교 위치를 현재로 옮겨온 1989년에 해체되었다.
1909년 기독청년부와 경기를 시작으로축구熱風(열풍) 몰고올 大統領金盃(대통령금배) (2) 高校蹴球(고교축구) 어제 오늘 1921년 제1회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등에 참가하는 등 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축구(1) 초창기 한국 축구를 이끌었으나 1945년 이후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창단. 1984년부터 14년 연속 우승과 47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는 등 수많은 전국대회를 우승하였다. 또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하였다.
1971년 창단. 창단후 7년간 우승 26회, 준우승 9회 등 수많은 전국대회를 우승하였다. 1979년 한 해에만 국가대표 7명 배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학 아이스하키부인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주장을 9명 배출한 명문팀이다. 8. 출신 인물[편집]역사가 매우 오래된 학교답게 다방면에서 많은 동문들을 배출했다. 특히 문화예술계가 두드러지며 염상섭, 이상, 현진건, 조정래, 김기림, 조세희같은 한국 문단을 이끈 기라성 같은 동문들을 많이 배출했다. 가나다순으로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9.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편집]교통편 정문 후문 지하철 5호선 9호선 올림픽공원역 둔촌오륜역 버스 상행[45] 올림픽공원역[46] 보성중고등학교 서문교회 3220 3319 3214 3412 3413 30-5 35 1 7 7-1 8 3316 하행[47] 보성중고등학교 동북중고등학교
10. 사건·사고[편집]10.1. 3학년 학생 단체 휴학 사건[편집]
10.2. 교사 불법촬영 사건[편집]보성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한 학생이 교사를 불법촬영한 사건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퇴학 처분을 내렸지만, 퇴학 처분을 내리는 시간을 끌어 다른 학교로 전학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피해교사는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에 휩쌓였지만, 학교측에서는 한 번의 잘못으로 학생의 인생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드는 것은 가혹하다며 피해 학생을 감쌌다. 사실상 학교 이미지가 좋지 않아질것을 우려하여 덮은 것. 정작 피해자인 교사만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셨다. 10.3. 아이스하키팀 감독 상습폭행 및 금품수수 사건[편집]학생선수들을 하키채로 때리거나 뺨을 치는 등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학부모들을 상대로 2년간 6천만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아이스하키팀 감독이 경찰에 입건되었다. 감독인 신 모 감독은 수년 동안 평소 훈련, 전지훈련 때를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하키채로 구타하거나 뺨을 때리는 등 수시로 폭력을 휘두른 사실이 밝혀졌고, 청소년대표 선발 추천을 빌미로, 부모들에게 금품을 요구한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교육청은 당시 보성고가 이 문제를 조사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지 않았고, 상황극이라는 진술을 의심없이 믿었다며 교장과 교감에게도 견책 처분을 내렸다. 서울시교육청은 신 모 감독에 대해 상습폭행과 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근데 여기서 문제될만한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21년 2학년 담임선생님중에 한명인 국어선생님 정 모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코치를 옹호한것이다. 10.4. 보성고등학교 교사 페미니즘 사상 강요 및 갑질 사건[편집]2021년 6월 서울 보성고등학교 학생의 폭로글이 에펨코리아에 업로드되며 페미니즘 사상의 강요 및 선생의 지위를 이용한 갑질 정황이 밝혀진 사건.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1. 기타[편집]이 사진에서 보이는 곳은 대부분 보성중학교가 쓰고 있으며 정작 이 사진 속 보성고등학교에서 쓰는 곳은 둥그런 모양의 건물과 앞쪽으로 돌출된 ㄷ자 모양 건물의 절반이고 나머지 보성고 교실들이 있는 곳은 이 사진에서 잘린 교사 동편에 있다. [1] 역사 문단에도 나와 있지만,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다.[2] 학교를 세워 나라를 버틴다는 뜻으로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있다.[3] 이 재단은 1928년 훗날 동국대학교가 되는 불교전수학교를 개교하였고 보성중학교는 1935년까지 동국대학교와 같은 재단이었던 것이다.[4]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만 인수했고 보성고보는 고계학원 산하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산하에 남고, 보성전문은 중앙학원(현 고려중앙학원) 소유로 바뀐다.[5] 학제 상으로는 이 때 보성중과 보성고가 분리되었다.[6] 관련기사[7] 그래서 고려대 교표에는 1905란 숫자가 쓰여져있고 보성고는 1906년을 개교년도로 하고 있다[8] 현재 학제 상의 중학교와는 당연히 다르다.[9] 현재의 보성고등학교[10] 현재의 보성중학교[11]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는 정작 보성이란 이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12] 휘문고의 교가도 이 사람이 작곡. 악보를 잘 보면 보성고와 휘문고의 교가가 표절 수준으로 비슷하다. 때문에 보성고에서는 교가가 휘문고 교가를 베껴서 그렇다는 썰도 돌았다. 보성고 교가의 멜로디를 좀 더 빨리 재생하면 휘문고 교가와 거의 똑같아진다.[13] 사거리의 한 직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14] 정확히 말하면 올림픽공원 부지 내 한국체육대학교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15] 개교 100주년 기념 현수막이 걸린 건물 부분은 '학급'으로 사용되는 교실이 없으며, 왼쪽에 있는 건물은 보성중학교 건물이다. 정작 짤린 오른쪽 부분에 고등학교 학급으로 사용되는 교실들이 있다.[16] 동문인 전 현대자동차 회장 정세영의 지원으로 현대건설이 준공을 맡았다. 당시에는 현대적 건축양식이라고 잡지에도 실렸다고 한다.[17] 후술할 문단 참조, 보성 아카데미반의 줄임말[18] 밤에는 교사들이 돌아가며 출석체크 및 관리감독을 한다.[19] 선생 동상의 다리가 너무 짧아보인다고 부인이 싫어했다고 한다.[20] 급식실에서 중학교 건물 쪽으로 올라오는 길에 이상(작가)의 한국 난해시의 최고봉 중 하나인 오감도 시제1호, 중학교 교정 쪽에 윤곤강의 잉경, 고등학교 교정 쪽에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김광균의 와사등.[21] 전부 남고다.[22] 2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열린다.[23] 강당이 타학교에 비해 매우 좁아 평상시에 본교생도 절반 밖에 못 들어가는데 외부인까지 몰려있으니. 게다가 강당이 계단식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 보다간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축제 시작하고도 2~3시간 기다렸다 들어가는건 예삿일[24] 개최 학교명의 앞글자를 뒤에 넣는다. 홀수 해에는 휘문고에서, 짝수 해에는 보성고에서 개최를 하기 때문에 홀수 해는 보휘전, 짝수 해는 휘보전이라고 불린다.[25] 수능 모의고사, 문제지에 자주 등장하여 익숙할 시 '바다와 나비'의 저자. '바다와 나비'는 이 학교 내에 시비가 세워져 있어 정문에서 등교하는 1학년들은 매일 아침 마주하게 된다.[26] '세시봉'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27] LA 발리언트 소속 프로게이머[28] 그 도올 맞다[29] 한세실업 대표이사[30] 매일유업 회장[31] 현 뉴데일리 고문, 내부자들(영화) 이강희 논설주간의 모티브로 추정[32] 두산그룹 박용성회장의 차남[33] 두산그룹 박용성회장의 장남[34]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35] 옛날엔 가수 하겠다고 했다가 교사들한테 엄청 까였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유명 가수가 된 후 교사들이 모교로 본인을 초청하였을 땐 "그땐 무지 깠으면서 이제 와서 부르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역시 마왕 당시 교사들의 평은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학교와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듯. 근데 실제로 현재까지도 교사들이 신해철에 인성에 관해 수업시간에 논하는 걸 보면 신해철 또한 학교 다닐 때 그다지 예의바른 학생은 아닌 듯하다.[36] 참고로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이다.[37] 이병철의 차남[38] 삼영산업 회장[39] 정주영의 동생[40] 정주영의 아들이자 현정은 현대 회장의 남편.[41] 조정래와 함께 사실상 가장 유명한 인물[42] 이 사람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산 적이 있으며, 심지어 이 사람이 쓴 소설에도 보성군이 나온다.[43] 동기인 신해철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신해철이 대학 시절 결성한 밴드 무한궤도 멤버로도 활동했었다.[44] 쌍화점, 미녀는 괴로워의 그 주진모가 아니다[45] 풍납동, 둔촌동, 하남시, 3316의 경우 마천동 방면[46] 보성중고등학교 정류장 미경유[47] 잠실, 방이동, 마천동, 동북중고등학교 경유 버스의 경우 둔촌동역 방면[48] 방이동 바로 옆이라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보성고까지 바로 오는 버스가 없다. 서울 버스 3413은 롯데월드타워까지 올라갔다 오륜동으로 향하고, 서울 버스 3319은 보성고에 내려주지 않고 올림픽공원역에 내려준다.[49] 현 이사장은 전성우 박사의 부인인 김은영 이사장이다.[50] 까까머리가 기본이던 80년대 이전에도 두발규제에 대한 내부규정이 없었던 걸로 유명하다. 물론 당시 사회분위기상 고등학생이 머리를 성인처럼 기르는건 불가능했지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e 중 머리를 기를 수 있고, 명찰을 달지 않는 학교는 보성고가 유일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전국 대부분의 중·고교가 학생들의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고 명찰 착용을 의무화시켰으나 당시 보성고 교장이 이에 맞서 두발단속을 하지 않았고 타 학교 학생들이 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51] 개교 후 학교 이전 없이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몽구, 정몽근, 이재용, 정용진, 정지선 등 재벌가 경영인들을 많이 배출했다.[52] 정의선이 졸업했다.[53] 당시 부촌으로 통했던 성북동과 가까운 혜화동에 있었으며 혜화동 또한 1980년까지는 부촌으로 통했다. 장면박사 가옥이 거기 있다.[54] 서울 4대문 內 포함 강북에 있던 많은 사립학교들(휘문고, 배재고, 양정고, 중동고, 배명고, 동북고, 한영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진명여고, 창덕여고, 정신여고 등)이 도심공동화로 1980년대에 한강 이남으로 이전했다. 그 분위기를 따른 것. 공립학교들(경기고, 서울고)은 70년대에 먼저 이전한 상태였다.[55] 권상우 분[56] 이 학교의 모티브는 상문고이다.[57] 100년된 민족사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학교를 골랐다고 한다.[58] 앨빈 토플러가 강연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골랐다고 한다.[59] 즉 16년도 졸업생, 15년에 고3이었던 학생들이 청강한 것.[60] 여담으로 역사와 전통, 최근 기준 인문계 대입 실적을 고려하면 보성고가 우위고 예체능계 배출 실적이나 학교의 인기, 전성기를 고려하면 동북고가 우위다. 엄밀히 말해 동북고는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 문제로 근 몇년간 침체기다.사실 2017년 이후로 보성도 입시가 박살나서 딱히 좋다고 말할수는 없다[61] 1972년생 동북고 졸업생이 증언하기를 동북고-보성고 학생들의 마찰이 잦자 동북고와 보성고에서는 각각 조회시간에 단상에서 동북고 학생-보성고 학생의 화해 세러모니를 연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보성중에서 동북고로, 동북중에서 보성고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