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왜] · 다대포진성 전투[왜] · 동래성 전투[왜] · 김해성 전투[왜]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왜] · 충주 탄금대 전투[왜] ·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조] Show
5월 한강 전투[왜] · 옥포 해전[조] · 합포 해전[조] · 적진포 해전[조] · 해유령 전투[조] · 임진강 전투[왜] · 기강 전투[왜] · 정암진 전투[조] · 사천 해전[조] 6월 당포 해전[조] · 제1차 당항포 해전[조] · 용인 전투[왜] · 무계 전투[조] · 율포 해전[조] · 여주 전투[조] · 제1차 평양성 전투[왜] 7월 웅치 전투[왜] · 전주성 전투[조] · 이치 전투[조] · 한산도 대첩[조] · 제1차 금산 전투[왜] · 안골포 해전[조] · 우척현 전투[조] · 제2차 평양성 전투[왜] · 해정창 전투[왜] · 영천성 전투[조] · 지례 전투[조]8월 제3차 평양성 전투[왜] · 청주 전투[조] · 제1차 경주 전투[왜] · 제2차 금산 전투[왜] · 영원산성 전투[왜] · 장림포 해전[조] 9월 화준구미 해전[조] · 서평도 해전[조] · 절영도 해전[조] · 초량목 해전[조] · 부산포 해전[조] · 연안성 전투[조] · 제2차 경주 전투[조] · 북관대첩[조] · 노현 전투[왜] · 창원성 전투[왜]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조] 12월 독성산성 전투[조] 1593년 제4차 평양성 전투[조][명] · 성주성 전투[조] · 벽제관 전투[왜] · 웅포 해전[조] ·행주대첩[조] · 노원평 전투[조] · 제2차 진주성 전투[왜]1594년 송유진의 난 · 제2차 당항포 해전[조] · 영등포 해전[조] · 장문포 해전[조] 휴전기 1595년 1596년 이몽학의 난 정유재란 1597년 기문포 해전[조] · 칠천량 해전[왜] · 고령 전투[조] · 남원 전투[왜] · 황석산성 전투[왜] · 어란포 해전[조] · 직산 전투[명] · 벽파진 해전[조] · 명량 해전[조] · 석주관 전투[왜] 1598년 사로병진책[왜] · 절이도 해전[조][명] ·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조][명] · 울산성 전투[왜] ·사천성 전투[왜] · 왜교성 전투[왜] · 노량 해전[조][명] · 남해왜성 소탕전[조][명]각주1 : [왜] : 왜군의 승리 / [조] : 조선군의 승리 / [명] : 명나라군의 승리 각주2 : 전투명 조선군의 3대 대첩 /전투명 왜군의 3대 대첩⠀ 한일관계 관련 문서 ⠀ [ 펼치기 · 접기 ] 역사 칠지도 · 신라-왜 전쟁 ·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 가야멸망전 · 백제부흥운동 · 백강 전투 · 원나라의 일본 원정 · 왜구 · 대마도 정벌 · 계해약조 · 삼포왜란 · 을묘왜변 · 사량진 왜변 · 임진왜란 · 조선통신사 · 기유약조 · 운요호 사건 · 조일수호조규 · 조일통상장정 · 주한일본공사관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동학농민운동 · 갑오사변 · 을미사변 · 톈진 조약 · 제물포 조약 · 한성조약 · 제1차 한일협약 · 청일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 · 을미사변 · 니시-로젠 협정 · 영일동맹 · 가쓰라-태프트 밀약 · 러일전쟁 · 포츠머스 조약 ·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 대한제국 군대해산 · 남한 대토벌 작전 · 을사조약 · 한일의정서 · 기유각서 · 한일약정각서 · 정미 7조약 · 간도협약 · 한일병합조약 · 일제강점기 · 친일반민족행위자 · 조선총독부 · 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독립군 · 한인애국단 · 한국광복군 · 국가총동원법 · 일본군 위안부 · 8.15 광복 사건 우키시마호 사건 · 6.25 전쟁 · 다이호마루 사건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독도대첩 · 재일교포 북송 ·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 6.3 항쟁 · 신오쿠보역 승객 추락사고 · 갑신왜란 · 경인대첩 ·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저공 위협비행 사건 · 한국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와 관련한 WTO 분쟁 · 아베 신조 한국 비하 발언 논란 · 도미타 나오야 카메라 절도 사건 · 일본 축구부 단체 절도 사건 ·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 제주 국제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 · 김포공항 일본 공무원 난동 사건 · 한일 무역 분쟁 ·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 · 홍대거리 일본 여행객 폭행 사건 · 대한민국 해경 일본 측량선 저지 사건 ·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사이트 독도 및 쿠릴열도 표기 논란 · 주한 일본 공사 한국 대통령 비하 발언 논란 · 2020 도쿄 올림픽 한국 선수단 현수막 논란 · 한-일 정상 약식회담 논란 · 2022년 일본 국제 관함식 욱일기 대함경례 논란 외교 한일관계 · 한일관계/2020년대 · 한일수교 ·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 주한일본대사관 · 한일기본조약 · 독도 밀약 · 전두환 대통령 일본국 공식 방문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6자회담 · 고노 담화 · 무라야마 담화 · 고이즈미 담화 · 간 담화 ·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행동계획 · 한일공동이공계학부유학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 한일 공동 고등교육 유학생 교류사업 · 문재인 정부/평가/외교/대일외교 · 윤석열 정부/평가/외교/대일외교 기타 한국군 vs 자위대 · 한중일관계 · 한미일관계 · 한국-대만-일본 관계 · 한일동맹 · 한일전 · 혐한/일본 · 반일/대한민국 ·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 독도 · 소녀상 · 동해/명칭 문제 · 토착왜구 · 친일파 · 친일몰이 · 반일씹덕 · 일본을 공격한다 · 한국 역사상 일본을 공격한 사례 · 일본 극우사관 이순신 [ 펼치기 · 접기 ] 소속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친구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해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이순신대교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임진왜란 · 정유재란 기간 임진왜란 장소 한반도[1], 만주 용정시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 교전국[2] 조선 일본(도요토미 정권) 지휘관[3] [ 펼치기 · 접기 ] 정부 수반 [ 펼치기 · 접기 ] 정부 수반 병력[33] [ 펼치기 · 접기 ] 동원병력 [ 펼치기 · 접기 ] 동원병력 피해[34] 조선: 최대 100만 명[35] 2만~17만 명 결과 조명연합군의 최종 승리 영향 조선의 정치적 혼란 가속·사회경제적 기반 초토화 1. 개요2. 명칭 2.1. 교과서에서 3. 전쟁의 배경3.1. 일본의 상황 3.1.1. 일본의 내부 사정3.1.2.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3.2. 조선의 대응4. 병력 구성4.1. 조선의 병역 체계 4.1.1. 정군(正軍)4.1.2. 조선 수군4.1.3. 오위(五衛)4.1.4. 조선의 방어 체계4.1.5. 조선군의 병력 구성 4.2. 일본군 병력 구성5. 전쟁의 경과5.1. 전쟁의 시작5.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5.3. 반격의 시작5.4. 명나라의 참전 5.4.1. 명나라군의 참전 이유5.4.2. 명나라군의 참전과 역할 5.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5.5.1. 기존에 잘못 알려진 설5.5.2. 왜 잘못 알려졌는가?5.5.3. 21세기 연구에 따른 실제 사실 5.6. 정유재란 발발과 전쟁의 종결5.6.1. 일본군의 퇴각 이유 5.7. 조선의 보복 논의6. 각종 논쟁들6.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조정?6.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6.3.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수?6.4. 육전은 의병과 승병의 독무대?6.5. 조총 때문에 초반에 무너졌다? 7. 평가7.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7.2. 일본에서의 평가7.3.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가 8. 전후 영향8.1. 조선의 전후8.2. 명나라8.3. 일본8.4. 조선인 포로 9. 기타9.1. 후일담 10. 창작물11. 관련 문서11.1. 조선 측 주요 인물 11.1.1. 조정11.1.2. 정규군 지휘관11.1.3. 의병장11.1.4. 기타 조선 측 인물11.1.5. 조선에 투항한 항왜 11.2. 명나라 측 주요 인물11.3. 일본 측 주요 인물11.4. 전투 전개 과정11.5. 기타 전투11.6. 기타12. 둘러보기1. 개요[편집]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37]부터 1598년 12월 16일[38]까지 약 7년간 조선과 일본(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자 두 민족의 통일국가가 가용한 유 · 무형의 모든 국력을 끌어 총력전으로 충돌한 유일한 전쟁이다.[39] 2. 명칭[편집]언어별 명칭 한국어 임진왜란, 정유재란 중국어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 항왜원조(抗倭援朝) 일본어 분로쿠노게이쵸노에키(文禄・慶長の役, ぶんろくのけいちょうのえき)
2.1. 교과서에서[편집]2011년 입학생부터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 적용되는 '동아시아사' 과목이 신설되었는데, 이 교과서에 '임진왜란' 표기를 '임진전쟁'으로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한일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 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2017년 기준 고등학교 3학년 동아시아사 과목 교과서에선 실제로 '임진왜란'이 아닌 '임진전쟁'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정유재란' 또한 '정유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서술되었듯 동아시아사 과목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사학관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소개하면서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동시에 서술하면서, '비록 역사적 갈등을 빚고 있지만 동아시아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함께 나아가는 협력 관계이다'라는 해당 교과목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3. 전쟁의 배경[편집]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을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 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45] 3.1. 일본의 상황[편집]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사카 성[46]
이에 대해 통신사인 김성일은 답서의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다고 여겨, ‘만일 이 글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이 있을 뿐, 가져갈 수는 없다.’고 따졌더니 현소가 서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글을 짓는 자가 말을 잘못 만든 것이라 핑계를 댔다. 그러나 전하와 예폐 등의 글자만 고쳤을 뿐, 기타 거만하고 협박하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이는 대명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대면서 고치지 않았다.
3.1.1. 일본의 내부 사정[편집]▲ '조선정벌대평정도'[58]
또한 원정군 총대장이 우키타 히데이에고 부사령관이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73]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대장이라도 별 실권없는 바지사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우키타를 상대로 교섭을 시도하지는 않고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직접 교섭했다. 3.1.2.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편집]근래의 일본발 설로서, 도요토미가 쇼군에 즉위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설이다. 3.2. 조선의 대응[편집]선조 어필 경복궁 근정전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 중이던 조정은 당파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80]
김성일과 류성룡의 대화는 훗날 동인의 실책을 덮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이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 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간신으로 욕먹는다. 다만, 김성일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임진왜란이 터지고 난후 자기 책임을 지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을 했다. 김성일이 아니었으면 홍의장군 곽재우는 지리산 은거기인이 되거나 역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또한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숨어 있던 김시민을 격려하여 병사한 이경의 뒤를 잇게 하고 진주성의 방어를 준비한 것은 진주대첩의 토대가 된다. 일본군의 침입 주요루트였던 경상도 전장을 동분서주하며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중앙군과의 대립을 중재하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신경썼던 실무형 인물이 바로 김성일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참조. 그리고,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과 달리 조선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했으며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고 1592년 개전 직전까지 쉴 새 없이 진행시켰다. 그러나 조선이 생각한 침공의 규모와 도요토미가 실제 실행한 침공의 규모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였고, 200여년간 전국적인 큰 전란이 없었던 조선의 준비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일본의 침공을 막기에는 부족한 정도였다. 4. 병력 구성[편집]4.1. 조선의 병역 체계[편집]조선의 군대는 크게 일반병인 정병과 수군 그리고 직업군인 오위로 나누어진다. 조선의 군역체계는 매우 복잡해 한국사 시험난이도를 높이는 주범 중 하나로 꼽힐 정도라 이 문서에서는 임진왜란과 연관된 내용 위주로 설명하고 자세한 내용은 해당 링크문서를 참고바람. 4.1.1. 정군(正軍)[편집]원래 조선의 병력 체계는 양인개병제로 모든 양인[87](16세~60세)은 군역의 의무를 지며, 평소에 농사를 지다가 순번이 되면 1~2개월씩 현역복무를 해야 했다. 이 때까지는 양반도 군역을 져야했다. 3정1군의 자연호별로 편제해서 가족원 성인 남성 3명 중 한 명이 복무하면 나머지 두 사람이 면제되는 식이었으며 이것이 봉족제다. 4.1.2. 조선 수군[편집]조선 수군도 기본적으로는 정병과 같은 제도를 따라 정병 대상자 중 일부를 수군으로 편제하는 식이었다. 수군은 대표적인 3D 직책으로 고되고 열악한 근무조건 탓에 아주 인기가 없던 군역이었다. 때문에 방군수포제로 돈 주고 빼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인원이 모자라서 양천불명자나, 죄인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요역 담당자가 부담해야 하는 면포도 3필로 육군인 정군의 2필보다 많았다.[92] 그래도 기피하는 사람이 많자 성종대에 아예 수군을 강제로 세습되게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고된 직책이라 조선 후기에는 수군이 칠반천역 중 하나로 천시되었다. 4.1.3. 오위(五衛)[편집]한편 농민군인 정군만으로 모든 국방을 감당하기 힘드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중앙군인 오위였다. 수도를 지키는 경군(한양에 주둔하던 군대) 대다수가 오위에 해당한다. 오위에는 시험을 통과한 직업군인인 갑사, 별시위, 파적위 등과 농민군인 정병, 그리고 왕실 종친 및 공신의 자제들로 구성된 충의위, 충찬위, 족친위 등(=군사적으로는 밥벌레)이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즉 오위군 전부가 숙련된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4.1.4. 조선의 방어 체계[편집]조선의 기본적인 방어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로 전시에 각 군의 병력을 한데 합친다음 중앙에서 장수를 내려보내서 이를 지휘하게 하는 체제로 전쟁 당시 여러 문제점을 보여 전후 속오군체제로 개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승방략, 진관 체제 문서 참고 바람. 4.1.5. 조선군의 병력 구성[편집]위 병역 제도를 통하여 조선이 실제로 가용한 병력이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병력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파악하기 힘드나 개전 1년 뒤인 1593년 1월 조선군의 병력이 얼마인지는 사료가 남아있다. 이하는 장부상 병력이 아니라 실제 운용중이던, 혹은 최소한 운용중이라고 조선 조정에 보고된 병력들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4.2. 일본군 병력 구성[편집]
5. 전쟁의 경과[편집]5.1. 전쟁의 시작[편집]8천 조선군, 16만 대군과 맞서다
5.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편집]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 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고니시에 의해 패배하였고 이일은 갑옷은 물론 구군복까지 벗어 던지고 완전히 나체로 도망쳤으며,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5.3. 반격의 시작[편집]조선군 전위가 싸그리 날라간 초기 전황과는 달리 개전 후 2달이 지나자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곽재우, 조헌,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의 재야 인사들, 정부에서 내려보낸 수령들의 주도로[117] 집결한 지방군들이 일본군의 육상 보급로를 압박하며 각지에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초반부에 너무나 빠른 진격에 놀라 급격하게 와해됐던 군세는 후퇴 후 본격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일본군의 공세에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1592년 6월 이후 당 해 말까지 벌어진 주요 지상전투가 약 17회였는데, 일본군이 주도해서 공격해온 횟수는 고작 4회뿐이었고, 나머지는 조선군과 의병이 오히려 선공를 날렸다. 승률에 있어서도 조선 측이 8번의 승리와 3회의 무승부를 기록한 반면 일본은 6회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적인 판세는 일본 측이 쥐고 조선 팔도 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되고 있던 것이다.[118] 거기다 겨울이 전보다 일찍 찾아오고 조선군 경기병대가 산골을 따라 기습을 감행하여 땔감의 공급을 차단하자 일본군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손실분을 메꿔줄 일본의 보급 선단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고기밥이 되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전략인 수륙병진에 차질이 생기고 전황은 고착되었다. 출처 일본군은 손자병법의 기본 방침대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칠 구상을 하고 여름에 대비한 보급품을 위주로 준비했는데, 날이 추워지자 이게 그대로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다. 특히 군량보급 문제가 심각하여 일본군은 뒤로 갈수록 노략질로 버티는 형편에 이르게 된다.
당시 선조와 함께 의주까지 몽진했던 대신들도 하나같이 요동으로의 망명은 반대했는데, 강과 바다를 통한 피난 의견은 제시하면서도 중국 망명은 결사반대했다. 6월쯤에 처음 선조가 요동 망명을 이야기했을 때의 신하들의 반응은 예의를 갖추어 달래는 느낌이었다면, 가면 갈수록 표현의 수위가 쎄진다. 6월 13일 기사에서는 요동으로 가려고 해도 중국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정도였다면, 8월에는 요동을 건너면 필부가 된다는 표현까지, 즉 '요동 가면 더이상 왕이 아니게 된다'라고 까지 한다. 5.4. 명나라의 참전[편집]만력제 자금성 태화전 5.4.1. 명나라군의 참전 이유[편집]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5.4.2. 명나라군의 참전과 역할[편집]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나라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128] 명나라 기병대를 묘사한 기록화
5.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편집]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강화파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이 전쟁을 끝내려고 국서를 조작해 양쪽을 구슬려삶으려다 승려 사이쇼 조타이에 의해 탄로가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노하고 강화가 파기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140] 히데요시는 회담의 진행에 적당히 개입을 하고 강화 조건을 조절하면서 명나라가 '책봉은 가능하지만 무역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책봉을 받고 나서 돌연 '조선에서 사죄의 표시로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화를 낸 후 조선이 명과 일본을 이간질했다는게 주요 논리인 세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다만 책봉을 받은건 확실한게 당장 히데요시의 책봉 교서와 만력제의 칙유, 관복, 인장이 지금까지도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연대기의 내용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다.# 5.5.1. 기존에 잘못 알려진 설[편집]20세기까지만 해도 상기되어있듯 강화 회담 관련해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141]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고, 일본국왕 책봉 따위는 필요없다며 분노한 히데요시가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고 민간엔 알려져있었다. 그리고 심유경은 문서 조작과 강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 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리고,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 추궁으로 처형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해 이듬해(1597년) 정유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는 설이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5.5.2. 왜 잘못 알려졌는가?[편집]21세기 들어 사료를 검토해 본 한중일 학계의 결론은 이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유학자와 병법가들이 내용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이게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해당 이야기가 실제 사실인냥 알려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는 국학이 등장하면서 자국을 높이고 타국을 깎아내리는 풍조가 성행했다.[142] 5.5.3. 21세기 연구에 따른 실제 사실[편집]사료만 찾아봐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1900년대 초 도쿠토미 이이치로(도쿠토미 호소)의 근세일본국민사(1918)에서도 사실이 아님이 지적된 바 있다. 2010년대 한중일 학계의 연구 역시 속설이 가짜임을 밝히고 있다. 아래 내용은 이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을 요약한 것이다.[143]
일본국왕 책봉문
만력제의 일본국왕 도요토미 히데요시 칙유
책봉정사 양방형의 보고
책봉부사 심유경이 병부에 보낸 품첩
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라고 황신과 다르게 보고한다.
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62]
5.6. 정유재란 발발과 전쟁의 종결[편집]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중 일부[168] 정유재란 종군기 1597년 8월 27일[169], 일본은 총 14만[170]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한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임진년에는 발도 못 붙였던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5.6.1. 일본군의 퇴각 이유[편집]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5.7. 조선의 보복 논의[편집]1598년 12월 노량해전으로 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군이 아직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상소로 대마도에 대한 보복전을 건의했다. 왜란 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황신은 대마도가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명군과의 연합작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1591년 조헌의 지부상소 때와 달리, 다년간의 왜란으로 시달려서 일본에 이를 갈고 있던 선조는 이번엔 이 상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비변사에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한다. 특히 당시 선조가 하루 안에 이 안을 논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공격전에 상당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각종 논쟁들[편집]6.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조정?[편집]임진왜란 때 정부 측(특히 선조)이 잘 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전쟁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 한국인의 인식은 상당히 나쁘다. 당시의 조정 인사들이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 측에서도 나름대로 가능성을 인지하고 대비를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비한 점이 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별 볼일 없는 탁상공론과는 거리가 멀었다.[183] 찌질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윤두수도, 이순신을 험담한 것 때문에 폄하받으나 전시 조정을 이끄는 기둥으로 한 축을 담당하였다.
6.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편집]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6.3.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수?[편집]동래성 전투 같은 전쟁 초기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전투들이나 행주 대첩 등 소수의 조선군이 다수의 적을 격파한 승전들 탓에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소수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군의 절대적인 물량은 그렇게까지 적지 않았다. 임란 초기에 실록에 나오는 병력들을 전부 다 합치면 최소 10만 명이 넘는다.
6.4. 육전은 의병과 승병의 독무대?[편집]과거 조선의 군사·행정체계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미진하던 시기에는 '조선 정규군은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한 것이 없고 육군 중에도 권율같은 일부 명장을 제외하고 무능해서 의병으로 때웠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조선 관군은 비록 임란 초기에 상정한 규모를 넘어서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중반기에 실전 경험이 쌓이면서 좋은 성과를 낸다.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소규모의 유격전, 공성전 등의 승리는 관군이 이루어낸 것이다. 의병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지만 관군과도 자주 힘을 합쳐 활동했다. 6.5. 조총 때문에 초반에 무너졌다?[편집]일반인들은 당시 조선이 조총이란걸 이때 처음 접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등 조선군 지휘관들과 관리들은 일단 조총이라는 무기의 존재 자체는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조선과 전쟁을 할 이유가 하등 없는 대마도주부터가 히데요시의 침략을 경고하는 뜻으로 조총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총은 강력한 화력투사 뒤 긴 장전시간이라는 단점이 있었으며 여기까지는 조선도 알고 있었으나 시간차 투입으로 이를 극복해낸 오다 노부나가의 전술에 대해서는 조선이 알 턱이 없었다. 일본군의 경우 조총병을 사격조와 대기조로 나눠 분리하거나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육군도 조총'만' 없었을 뿐이지 총통과 같은 화포들은 고려말 우왕 때부터 왜구를 상대로 운용해 왔으며[194], 장전 방식과 운용면에서 조총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 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7. 평가[편집]7.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편집]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지는 한국의 긴 역사에서 있었던 모든 전쟁을 통틀어서도 대중적 관심도가 높은 역사적 사건이다. 단적으로 말해 역사학자들도 임진왜란이 남긴 전쟁의 여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21세기인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큰 영향력을 지닌다고 말할 정도다. 전쟁의 기간이 7년에 이르는 장기전이었고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전쟁이라는 점에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았으며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사명대사 등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의 무용담이나 민간전설도 많다. 비록 피해가 컸을지언정 전쟁의 끝도 결과적으로 방어와 반격에 성공하고 승리로 귀결되었기에, 일방적으로 학살과 겁탈, 국토 유린을 당한 종국에 왕이 굴복하여 한국 역사의 최대 흑역사로 남은 병자호란과 비교하여 긍정적인 평가도 상당하다. 7.2. 일본에서의 평가[편집]일반적으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실책으로 취급하거나 가만 있던 이웃나라 조선과 명나라를 건드려서 고립을 자초한 부질없는 일로 기록을 한다. 명분상으로도 밀리는 침략자의 입장이며 조선 정복 및 대륙 진출이라는 본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만 초래한 패전이기에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임진왜란(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강항의 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7.3.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가[편집]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211] 이러한 인식은 알레산드로 발리냐뇨(Alessandro Valignano)[212]가 1592년에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8. 전후 영향[편집]임진왜란은 분명히 조선과, 원군을 보내준 명이 승리한 전쟁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조선의 영토를 교두보로 삼은 명의 침략과 조선 정복이었고[240] 조선의 전략 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정권 일본은 원했던 전략 목표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조선을 떠나야 했고 퇴각 과정에서도 조명 연합의 노량 해전을 통해 철저하게 응징되었으므로 도요토미 정권 일본이 패배한 전쟁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241] 8.1. 조선의 전후[편집]▲ 전후 인구 변화 ▲ 전후 토지 변화
8.2. 명나라[편집]
8.3. 일본[편집]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채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정권은 애초부터 명분 없는 전란을 일으켜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영주들의 원성이 높았다. 긴 전란으로 인해 착실하게 쌓아온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후유증이 심했다.[254]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8.4. 조선인 포로[편집]
일본군은 전쟁 중 수많은 조선인을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노예 시장에 팔아 넘겼다. 특히 나가사키의 노예 상인들은 인신매매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 9. 기타[편집]
9.1. 후일담[편집]
10. 창작물[편집]자세한 내용은 임진왜란/창작물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1. 관련 문서[편집]†표는 전사, ‡표는 처형 혹은 옥사, +표는 병사 11.1. 조선 측 주요 인물[편집]11.1.1. 조정[편집]
11.1.2. 정규군 지휘관[편집]
11.1.3. 의병장[편집]
11.1.4. 기타 조선 측 인물[편집]
11.1.5. 조선에 투항한 항왜[편집]
11.2. 명나라 측 주요 인물[편집]
11.3. 일본 측 주요 인물[편집]
11.4. 전투 전개 과정[편집]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 해전은 ★ 표시를 한다. 또한 전쟁의 흐름상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전투는 볼드 처리.
11.5. 기타 전투[편집]
11.6. 기타[편집]
12. 둘러보기[편집]임진왜란 조선 육군의 주요 승리 [ 펼치기 · 접기 ] 전투 해유령 전투 정암진 전투 이치 전투 우척현 전투 주장 신각 곽재우* 권율 김면* 전투 청주 전투 북관 대첩 진주 대첩 행주 대첩 주장 영규* 정문부* 김시민 권율 * 의병장 허난설헌 [ 펼치기 · 접기 ] 소속 허씨 5문장 · 동인 · 이달의 문화인물 가족 아버지 허엽 · 이복 오빠 허성 · 동복 오빠 허봉 · 동복 동생 허균 이복 언니의 남편 우성전 · 남편 김성립 · 장남 김희윤 남편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 관련 인물 스승 (이달) 작품 내 등장인물 (신선) 주군 (선조) 관련 장소 허난설헌 일가의 생가와 외갓집 강릉 · 허난설헌의 친가 한양 건천동 허난설헌 일가의 묘소 용인시 · 허난설헌의 묘소 광주시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작품 난설헌시집 · 규원가 · 그 외 작품 기록에서의 생애 · 창작물 평가 논란 허균 [ 펼치기 · 접기 ] 소속 허씨 5문장 · 북인 · 선무원종공신 · 이달의 문화인물 가족 아버지 허엽 · 이복 형 허성 · 동복 형 허봉 · 동복 누나 허난설헌 이복 누나의 남편 우성전 · 동복 누나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 · 조카 김희윤 매형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 · 딸 소훈 허씨의 남편 폐세자 이지 관련 인물 스승 (이달 · 사명당 · 류성룡) 친구 (강변칠우 · 이매창 · 박엽 · 유몽인) 존경하는 인물 (정도전 · 이순신) 본이 되는 인물 (방회 · 이지) 작품 내 등장인물 (이달 · 홍길동) 주군 (선조 · 광해군) 관련 장소 허균 일가의 생가와 외갓집 강릉 · 허균의 친가 한양 건천동 허균 일가의 묘소 용인시 · 허난설헌의 묘소 광주시 친구 강변칠우의 거주지 여주시 · 이매창과 교류한 장소 부안군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 계축옥사 작품 홍길동전 · 도문대작 · 그 외 작품 기록에서의 특징 · 생애 · 창작물 평가 평가 · 사상 [1] 평안도 일부를 제외하기도 함.[2] 조선, 명, 일본의 요청으로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과 아유타야도 참전이 거론되긴 했으나 아유타야는 거리 때문에 무산되었고, 류큐는 일본의 군사적인 압박으로 참전하려고 했었지만 상국이었던 조선과의 조공, 무역 문제 등으로 전면 무산되었다. 또한 당시 국가는 아니었으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도 조선에게 참전의 뜻을 밝혔지만 조선의 거절로 무산되었다.[3] †표는 전사, ‡표는 처형 혹은 옥사, +표는 병사.[4] 사실상 조선 전시군주[5] 이산해 → 류성룡 → 이원익 순(順)으로 전임(轉任)[6] 윤두수 → 이덕형 순(順)으로 전임(轉任)[7] 유홍→ 정탁 → 이항복 순(順)으로 전임(轉任)[8] 류성룡→ 이원익 순(順)으로 전임(轉任)[9] 오늘날 위관급 장교 정도의 직책이 이 당시의 종사관인데 신립의 부관이라서 포함된다. 원래 김여물은 알성문과 장원급제자로 관찰사의 보좌관인 종5품직 忠州都事과 종3품직인 담양부사를 거쳐 전쟁 1년 전에는 정3품직인 의주목사까지 오른 인물이였다. 그러나 세자건저 파동에 따른 여파로 정철의 투옥되었다.[10] 김성일 → 이일 순(順)으로 전임(轉任)[11] 김명원→ 권율 순(順)으로 전임(轉任)[12] 도원수로 전임(轉任)[13] 이각 → 고언백 순(順)으로 전임(轉任)[14] 조대곤→ 김성일 → 유숭인 순(順)으로 전임(轉任)[15] 김해성 전투 당시 진주로 달아나여 진주 목사로 전임(轉任)[16] 경상좌병사로 전임(轉任)[17] 인종의 외척으로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숙청당한 윤임의 아들이다. 복권된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18] 윤인함→ 변응성 순(順)으로 전임(轉任)[19] 김시민 → 서예원 순(順)으로 전임(轉任), 그런데 사실 전쟁 초기에는 이경(李璥)이라는 인물이 목사였고, 김시민은 진주 통판이였으나, 이경이 달아났다가 죽고나서 목사업무를 대행하였다가 조정에서 목사로 임명받았다.[20] 이순신 → 원균 → 이순신 순(順)으로 전임(轉任), 이순신 사후에는 代 무의공 이순신 → 이시언 순으로 전임.[21]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인물[22] 박홍 → 이운룡 순(順)으로 전임(轉任)[23] 원균 → 배설 → 권준 → 배설 → 무의공 이순신 순(順)으로 전임. 원균은 충청 병사 →전라 좌병사 →삼도수군통제사 순(順)으로 전임(轉任)[24] 이순신 → 원균 → 이순신 순(順)으로 전임(轉任)[25] 이억기 → 김억추 → 안위 순(順)으로 전임(轉任)[26] 최호 → 권준 → 오응태 순(順)으로 전임(轉任)[27]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송빈, 이대형, 류식과 함께 사충신으로 불리운다.[28]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송빈, 김득기, 이대형과 함께 사충신으로 불리운다.[29]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김득기, 이대형, 류식과 함께 사충신으로 불리운다.[30] 놀랍게도 그 원균의 동생이다. 하지만 형과는 반대로 인망이 있었고 활약도 했다![31]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송빈, 김득기, 류식과 함께 사충신으로 불리운다.[32] 실제로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제일 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나중에 도쿠가와가 집권 후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이유가 된다.[33]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34] 임진왜란의 정확한 사상자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치는 자료에 따라 조선 측 사상자는 10만에서 100만, 일본 측 사상자는 2만에서 20만 이상으로 차이가 크다. 일반적으로 한국과 중국 측 자료에서는 조선과 명나라군의 인명피해를 작게 잡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학자들마다 사상자 수가 다르니 참고할 것. [35] 민간인 포함[36] 다만 이들 가운데 다수는 사명대사, 손문욱, 김효순 등의 활약으로 쇄환될 수 있었다. 물론 피랍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에 잔류한 것 역시 사실이다.[37] 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왜군이 쓰시마에서 아침 8시에 출정하여 부산에 오후 5시에 도착한다.[38]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39] 고대 삼국시대의 백제를 돕기 위해 왜가 원군을 보내어 고구려, 신라와 충돌한 사례, 고려말 고려-왜구의 교전, 조선 전기의 왜변 등 비교적 규모가 작은 국지전은 수 차례 있었으며 근대에 들어서도 조선-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 일본과 교전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민족과 일본민족 양 통일국가 간 총력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유일하다.[40] 이를 본따서 중공은 6.25 전쟁을 가리켜 북한을 도와 미국에 맞섰다는 뜻을 내포해 항미원조전쟁으로 부른다.(물론 이는 중공 한정이지 대만은 한국전쟁, 줄여서 한전이라고 부른다.)[41] 우파에서도 민족주의자와 탈민족주의자가 있듯, 좌파에서도 민족주의자와 탈민족주의자들이 나뉘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현대의 이념이나 사상은 좌파, 우파 2가지로만 나누기엔 스펙트럼이 꽤나 넓다.[42] 다만 이 주장은 어폐가 있는 것이 일본 자신들부터가 자국을 '왜'로 칭했었다.[43] 2차 세계대전을 '나치의 난'이라고 부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2차대전은 그 속에 열강간의 식민지 경쟁, 태평양 전쟁, 중화민국 분열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이 얽힌 거대한 규모의 전쟁인데 이걸 그저 나치 하나에만 집중하여 나치의 난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역시 여러 사건들이 얽힌 대전쟁인데 그저 왜구들의 난으로 치부할 수는 없단 것이다.[44] 명 - 청 교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정권이 멸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조선은 전쟁 최대 피해국이었던만큼 당연히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사건이다. 이후 대동법 개혁 등 사회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45] 면포는 전쟁의 경과에도 큰 영향을 줬는데, 조선 수군이 판옥선 같은 대형선을 주력으로 쓸 수 있었던 것도 돛에 필요한 양질의 면포가 자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시점까지 목화의 자체 재배에 계속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포의 대량 공급이 어려웠고 좀더 작은 돛으로도 추진 가능한 한 체급 낮은 세키부네가 주력선이 된다.[46] 지금의 오사카 성은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의 진) 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한 것이 여러 이유로 또 다시 소실되었다가, 20세기에 도요토미 시대와 도쿠가와 시기의 모습을 섞어 개건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오사카 성 건물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47] 소 가문은 근대화 후 화족 중 백작 작위를 받는다. 덕혜옹주의 배우자였던 소 다케유키 백작의 가문이기도 하다.[48] 이 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 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비웃었다거나, 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덕분에 이 이야기들은 전쟁 이전에 조선이 평화에 젖어 있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고 까는 근거로 잘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는 조선 교섭 임무를 실패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49] 이 사람의 고조부가 그 유명한 황희다. 황희의 장남 황치신의 증손이다.[50]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형이다.[51] 황윤길은 당시 당파로 서인이지만, 김성일과 허성은 동인으로 같은 당파였다.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는 것이 비록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비롯되었지만, 송강 정철이 세자건저문제로 실각하면서 그에 대한 처벌 강도를 두고 나눠진 것이며, 보다 본격적으로 분화되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시에 재상으로 활동한 서애 류성룡에 대한 비난을 남명 조식 학파가 하면서 본격화 된 것이였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류성룡과는 사제지간이기에 이후 남인으로 분류되며, 허균의 형인 허성은 퇴계의 학파<嶺南(左道)學派>가 아니고, 동인 내에서 두루 교류한 아버지와 북인(특히 대북)에 속하는 동생의 영향으로 북인으로 파악하는 듯하다.[52] 간토 및 도호쿠 지역.[53] 이 때가 바로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성을 공격하던 시기였다.[54]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55] 합하(閤下)는 전하보다 낮은 경칭으로 재상급 인사에게 붙이는 것이다. 이런 경칭들은 기본적으로 본인보다 격이 낮거나, 아랫사람에게 붙이는 경우는 없으나, 경칭의 격을 낮추면서, 조선 국왕을 은근히 모욕한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56] 1590년. 당시 일본의 연호[57] 원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58] 가운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쪽으로 조선 침공에 참여한 각 지방 영주들이다.[59] 당시 난부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의 후계 자리를 놓고 양자인 난부 노부나오와 사위인 코노헤 마사자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명 코노헤의 난[60]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다테 마사무네는 이후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반란 혐의를 샀는데도 이 공적 덕분에 생명을 보전했다. 죄질 자체는 사형이나 개역에 쳐해질만한 사안이었지만, 히데요시는 임란 참전 공로를 인정하여 목숨을 면하게 했다. 다만 그 대신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61] 혼슈의 대도시 나고야와는 다른, 사가현의 나고야다. 규슈섬 북단으로 후쿠오카에 가깝다.[62]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 진주 박물관, 장원철 - 오만 역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63]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64] 가모 히데아키의 아버지다.[65] 도쿠가와 직할령은 말 그대로 직할령 400만 석,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의 300만 석으로 총 700만 석이었으나 그 밑의 다이묘들은 끽해야 모리 가문의 조슈,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마에다, 다테 가문 정도를 제하면 몇 십만 석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6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4만 석 가량에 더해 광산, 무역 수입을 얻었다. 5대로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능가하는 260만 석을 웃도는 석고를 보유했으며 특히 그 둘의 격차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보다 컸다. 또한 5대로를 포함해 어지간한 메이저 다이묘들은 100만 석 이상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67]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가타케 전투로 처음 영지가 주어질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 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68] 참고로 다른 오대로의 경우 우키타 히데이에(57만석)는 총사령관 겸 8군 대장, 우에스기 카게카츠(120만 석)는 잠깐 참여함, 도쿠가와 이에야스(256만석)와 마에다 토시이에(100만석)는 참전하지 않았다.[69] 마쓰라 노부자네(松浦信實)가 다스리던 곳이다.[70] 조선왕조실록에는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도 쓰이지만 평수가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조선이 '비전 재상'이라는 별명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우시(羽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씨인 하시바(羽柴)를 의미하며, 1587년 우키타 히데이에가 하시바 성씨를 하사받은 것을 의미한다.[71]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72]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 이키에 동생인 마쓰라 노부자네를 보내 다스리게 한 사람이다.[73] '선봉(先鋒) 소서행장(小西行長)·대총병(大摠兵)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부총병(副摠兵) 삼성(三盛)'(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임술 8번째 기사)[74] 조선에선 이를 거추, 즉 대추장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조선이랑 교류했던 대표적 거추는 오우치 씨지만 이 당시엔 이미 수십년 전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망했다.[75] 해동제국기의 목차 중 일본국기(日本國紀)에서 천황대서(天皇代序), 국왕대서(國王代序)로 천황과 일본국왕(쇼군)을 분명히 따로 기록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에서 일본에 관해 궁금할때마다 찾아보는 기본 자료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러번 언급된다.[76] 고대의 신라와 왜는 사이가 끔찍하게 나빴다. 자세한건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및 신라-왜 전쟁 참조[77] 한국이 전통적으로 일본을 '왜'라고 부른것 처럼, 일본은 한국을 '고려' 혹은 '계림'이라 불렀다. 여기서 '계림'은 신라를 뜻한다[78] 그들 또한 정치적 사활을 조선으로의 팽창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히데요시와 정치적 입지가 묘하게 겹친다[79] 조선 정복을 군사적 침략이 아닌 '고토회복'으로, 조선민족 합병을 '동조동근론'의 맥락에서 봤다는 면에서도[80] 제7차 교육과정의 국사에서도 사신들의 의견대립이 원인이 되어 일본이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가르쳤으며 2020년 기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사신의 의견대립이 원인 중 하나로 나온다.[81] 이에 대해 류성룡은 전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입을 막지 못했는데 한 줄기 강물을 가지고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실제로 왜적은 이 정암진을 넘는 데 실패했다.[82] 정읍 현감이었다.[83] 이런 하루만에 이루어진 미친듯한 진급 속도는 1년 전에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하려 하자 진급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반발했던 사간원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현대 군으로 치자면 대대장 정도가 맡아본 가장 높은 지위인 군인을 하루 아침에 사단장에 앉혀논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군필이라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무리한 인사인지 단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동아시아에서 전근대시기에 관직(官職)은 해당 인물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관품(官品)과 실제로 담당 업무를 볼 수 있는 직책(職責)으로 나눠서 생각해봐야한다. 즉, 품계(品階)와 직책(職責)이 동일하지 않고, 한쪽이 낮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직은 업무 일수에 따라서 오를 수 있는 당하관(堂下官)직과 다르게 왕의 임명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품계는 1년전에 종3품직 수행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고, 5품 이상은 왕의 선발로 당상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84] 시계를 더 뒤로 돌려봐도 10만 규모의 해외원정은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85] 경상도가 왜침을 겪은 것은 80년 전 삼포왜란이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우도는 제포(웅천), 좌도는 부산포와 염포(울산) 일대에 그쳤지 내륙으로는 확대되지 않았다. 즉 (왜적이 1~2만 정도라는 전제 하에) 잘해야 해안가 지역 좀 축성하고 정 불안하면 남강 연안에 방어진지 정도 구축하면 될 것을 왜 구태여 유생까지 동원해가며 내륙지역에서까지 난리를 치냐는 것이 당시 경상우도 유림들의 불만사항이었다. 위에서 소개한 이로의 편지도 당대의 예측에 의거하면 꽤 상식적인 소리긴 하다. 해안가 요새들을 돌파해 남강 연안까지 당도할 때 쯤이면 그야말로 민병대에게도 썰려나갈 수준일테고, 실제로도 정암진에서의 전투 결과도 그랬으니까.[86] 수군 역시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경상좌수영은 나름대로 전력을 강화했어도 애초에 독자적인 작전이 어려울 정도로 영세했고, 수군 최대 함대전력은 호남 가는 길목을 지키는 경상우수영이었다.[87] 관리, 공신의 자손, 성균관 학생, 천민, 노비, 장애인 등은 제외[88] 다만 정군에 속한 기병은 3명에게서 포를 받았다. 그리고 양계갑사는 다른 갑사들과 달리 5명에게서 포를 받았다.[89] 장정 1인의 연간 군포 2 필은 쌀 12 말에 해당하며,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달하는 무거운 것이었다. 당연히 재물이 끼게 되니 부정부패가 없을 수 없고, 이것이 조선 사회에 큰 문제가 되지만 이 문서는 임진왜란에 관한 문서이므로 생략.[90] 조선시대 인구는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른데, 정부 산하 역사연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은 1172만명출처, 통계청이 발간한 인구대사전에서도 1600년 인구를 1,172만명으로 잡고 있다.[91] 당시 고고학 유골 조사에 따르면 당시 성인 남성 조선인 평균 신장은 164cm였고 일본인은 155cm로 10cm 차이가 났다.[92] 숙종 때 2필로 감면.[93] 오위 중 의흥위에 소속[94] 실제로 유자광이 갑사 출신으로 병조판서 및 숭정대부의 자리까지 올랐다. 다만 유자광은 세조가 밀어준 덕이지만, 별시 문과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에 이 성적을 바탕으로 출세한 것이다. 일반 갑사들은 경국대전에 의해 종4품까지가 승진한계였고, 금군은 정3품 당하관까지가 승진한계로 당상관 이상 출세하려면 역시 과거 급제자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갑사 중에 무과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이징옥이 갑사 재직중에 무과에 급제하고 종1품 숭정대부까지 승진한 경우였다. 물론, 조선사회에서 종4품이라도 상당히 출세한 것이니, 갑사가 결코 나쁜 대우를 받은건 아니었다.[95] 금군은 편제상 오위와는 별개의 조직이나, 직업군인이라는 점에서 여기에 포함해 서술. 정확히는 오위 병사들 중에서 무예와 용모가 뛰어난 자들을 특별히 선발해 내금위와 겸사복으로 편성했다. 우림위는 오위 병사 중 서얼인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 임명한 직책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서얼에 대한 보상적 취지도 있었다. 품계상 내금위나 겸사복보다는 아래였지만 일반 갑사보다는 위였다.[96] 초기에는 경제적인 여력이 되는 양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규모가 증대해 일반 양인들도 들어오게 된다. 오위 중 좌위인 용양위에 소속되었다. [97] 중종대에 창설되어 광해군 대에 폐지. 한량들이 금군으로 근무하려면 정로위 근무경험이 필수였다.[98] 평안도 병력만 한자리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건 이곳이 바로 선조와 조선 조정이 피난가 있던 의주가 있는 곳이라 병력 현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였다.[99] 1475년(성종 6년) 총군병 148,849명 중 수군이 48,800명, 만기요람(1808)에 의하면 총 수군 장졸수가 36,804명이었다. 전쟁 때도 3~4만 정도의 수군을 유지했을 것이다.[100] 군사 평론가 신재호의 글 참조.#[101]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102] 거제도랑 울릉도를 봉토로 받은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 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여기에 쓰시마 도미 중 조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56명, 쓰시마에 살던 조선인 5명을 통역으로 종군 시켰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0,000 ~ 50,000명을 겨우 웃돈다. 소 대신 무네라고도 읽는다. 그래서 무네 요시토모라고도 한다.[103] 당시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않던(앙숙 수준이였다.) 가토를 2군으로 보냄으로써 서로 경쟁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04] 일종의 후방 예비대, 보급대 성격이 강했다.[105] 경기도에 진주한 명목상의 총사령관.[10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로 원래 하시바 히데카쓰로 불렸으나 1586년부터 하시바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성씨를 쓰면서 이를 따라 도요토미 히데카쓰로 개명. 거제도에서 병사했다.[107] 히데요시에 의해 군 전체를 감독하고 비상시에 의견을 조율, 보고하는 직을 맡음.[108] 미츠나리의 졸전은 이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이어진다.[109] 조선 조정이 전쟁의 발발을 알게 된 것은 꽤 늦은 4월 17일이었다. 봉수가 작동하지 않아 장계로서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10] 원균이 이순신에게 보낸 공문에선 박홍과 이각은 한차례 동래성 북쪽으로 접근했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안방준의 묵재일기에선 제승방략에서 감사와 병사는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밖에서 호응한다고 언급했다. 박동량의 기재사초에 박진과 이각이 소산역에서 전투 방식을 놓고 의견을 조율한 대목이 나오는걸 보면 적어도 이때까진 이각에게 싸울 의지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111] 이 400척을 일본군의 전력으로 판단해 일본군 규모를 1만 가량으로 추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112]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 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였다.[113] 애석하게도 이렇게 보병 중심인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한 삼수병 체제를 만들고 나니, 이번엔 북방 유목민 후금-청이 달려왔다.대 북방 테크일때는 남방한테 찔렸고, 대 남방 테크일때는 북방에게 찔렸다. 고려시대부터 북방의 유목민, 남방의 왜구라는 양면전선에 시달리던 한반도 왕조의 어려움이 보이는 구도였다.[114] 탄금대 vs 조령 논쟁은 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115] 기록마다 큰 칼과 조총 사이에서 어느쪽이 주력이었는지는 다르다. 다만 기존의 수적 주력이었던 장창은 회전에서는 기병이 주력이고 보병은 농성 위주로 싸운 조선군을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116] 일본으로서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전국시대의 전쟁에서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그 영지에 대한 권한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편 끝까지 저항하거나 자결한 경우는 그 영주의 친척들이 영지에 대한 권한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든 세력을 모아 영지를 점령한 영주에게 맞서는 것은 정당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당시 조선에서도 이런 인식은 비슷했다. 차이점은 왕의 영지가 일본과 달리 조선 전 국토였다는 점. 그래서 후에 선조가 의주목에서 요동으로 넘어갈려고 했을때는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다.[117]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래 '임진왜란의 오해'에 기술.[118] 게다가 성을 포위해 말려죽이고 항복을 받아내던 일본 국내의 공성전과 달리 조선에서의 공성전은 항복 그딴거 없이 너죽고 나죽자 식의 사생결단이었고, 그때마다 비장의 수나 다름 없는 철포 사격으로 타개할 수 밖에 없었다. 초반에야 철포의 충격력으로 승리를 거듭하면서 쾌조의 진격이 이어졌지만 반복되는 공성전으로 인한 철환과 화약의 소모도 무시하기 힘들었다.[119] 취미삼아 백성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인 껍데기만 왕자인 악한이었다.[120] 여러 번 양위 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 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121] 누구 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122] 이들 왜인들 우두머리는 수도 한양까지 상경해서 임금에게 문안 인사를 해야 했는데, 이들이 상경하기 위해 이용한 내륙 이동통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일본군의 북상 통로가 됐다. 진격 속도가 빨랐던 데는 이런 원인들도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왜인들의 상경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123] 맹자에 이르기를 탕과 무가 폭군인 걸왕과 주왕을 참살한 것은 그들의 주군을 벤 것이 아니며, 인과 덕을 잃어 필부(匹夫)가 된 자들을 벤 것이라 했다. 즉 요동으로 가시면 걸이나 주 같은 폭군이 되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되면 자신들이 탕과 무의 일을 행할 것을 암시하는 대단히 무서운 협박이다.[124] 이 근방에 청나라의 건국자인 누르하치가 있었다.[125] 이 당시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질린 함경도의 조선인들도 일본군과 같이 함께 침공했다고 한다.[126] 소 요시토시 입장에선 조선과 일본의 협력이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일부러 누그러뜨려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그는 줄곧 전쟁 반대를 주장해 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기도 했다.[127] 게다가 조명관계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를 상국으로서 사대하는 위치에서 대명 외교를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명으로 갈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만불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명을 칠만한 대군이 아무 방해없이 한반도를 횡단하게 해준다는 것 자체가 '너네는 싸울 것도 없이 그냥 깔고간다'는 의미인 셈.[128] 더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조선까지의 거리 때문에 식량 운반의 문제도 있고 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강화 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일본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셈.[129] 출처[130] 그러나 열심히 싸운 것과는 별개로 벽제관 전투 때는 처참히 깨졌고 울산성 전투에서도 패배했고 사천성 전투에서도 대패했다.[131] 명나라군이 평양성 문을 뚫을 때 사용했다는 병기가 다름아닌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홍이포였다. 명나라군의 포격에 대해 실록이나 징비록등의 조선측의 사료에서도 산악이 흔들린다거나 하늘이 무너진다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극찬을 하는 장면이 여러 군데 발견된다.[132] 전란 발발 직후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가 버린 시점에서 애초 일본군의 계획은 처음과 달리 어긋나기 시작한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는 것은 물론, 예상치못했던 의병과 수군의 활약으로 후방마저 안전치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무서운 추위까지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133] 사실 그 이전부터 숫적으로 몇 만은 족히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는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로는 굳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전투 의욕을 보인 시점은 정유재란 초기 때다.[134] 소빙기가 시작하여 거의 경신 대기근에 준하는 기근이었다.[135] "선전관 조안방이 보내온 보고서를 보니 ‘경상 한 도에 왜적과 서로 대치하는 각진의 군졸은 6-7천에 불과하고, 그 중에는 한 장수가 거느리고 있는 군졸이 혹 6∼7명인 자도 있으며, 각진에 있는 활도 겨우 1백여 장(張)뿐이었다. 이런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강한 왜적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군량이 결핍된 지 이미 오래되어 하루에 먹는 양이 한 홉의 죽에 불과하니 매우 한심하다. 본도에는 비록 약간의 비축이 있고, 이웃 도에도 또한 이송하여 온 곡식이 있다고는 하나, 중국군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군사들은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군량이 부족한데 그마저도 명나라 군대에게만 공급된다는 기록을 보면 정말로 조선의 식량사정이 나아졌을지는 미지수다.[136] 전란을 거치며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민심은 선조가 아니라 전쟁 영웅들로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자국 장수가 아닌 명나라군을 드높이면서 이러한 명나라군을 불러온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자국 장수들의 업적을 폄하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실제로 실록에는 선조가 자국 장수들이 세운 공은 명나라군을 따라 다니며 얻은 것으로 작은 공밖에 세우지 못했다며 폄하하는 부분이 있다.[137] 명나라군도 멀쩡한 조선인을 일본군 앞잡이로 오해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살해한 사례는 있으나, 행정 구역 단위로 의도적인 학살을 한 적은 없다. 단,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는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긴했다. 하지만 이 남원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부총병관 양원 휘하의 병사 50여 명 만이 탈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을 뿐이고, 3,000명 이상의 명나라 군대는 남원성에서 조선 군민들과 함께 남아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전원 전사했다.[138] 일본 수군의 본질적인 한계와 이순신 덕분에 일본군은 본국에서의 보급과 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조선인들을 꽤 많이 징발하는데 성공하여 막강한 방어 능력을 갖춘 요새까지 건설할 정도였다.[139]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무쌍을 찍으면서 이기는 게 확실시 되었다. 물론 마지막에 물러날 때까지도 상당한 승산이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측면이 있어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명나라군하고 조선군의 양측 기록에서도 일본군이 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신뢰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거기다 일본 위키만 참조해도 제삼자인 여진족들도 일본군이 걍 이기고 말 것으로 나오나 막상 당시 판단은 그 별것도 아닌 오랑캐들 때문에 중국 침공은 무리라는 식이었다.[140] 2020년 제작된 임진왜란 관련 한 유튜브 영상(약 9분부터)에서도 잘못 알려진 설이 그대로 담겨졌다.[141] 대개 전국 시대의 무장들은 문맹이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한 고니시는 사전에 심유경과 짜고 사이쇼 조타이를 시켜 위조된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는 주장. 참고로 이 사람이 게임 임진록2에 일본 영웅으로 등장하는 그 '세이쇼오'다. 이 인간은 진구황후 전설에 푹 빠져 산 인간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을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사이쇼 조타이 문서 참조.[142] 국학자들이 주목하였던 것이 신도와 천황이었고 일본 전통사서들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내용이 임나일본부설의 바탕이 된 일본서기의 신공기이다.[143] 豊臣秀吉의 冊封問題와 壬亂期의 講和交涉, 임진 전쟁기 강화 교섭 연구,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연대기, 大君外交と東アジア, 한일 문화 교류 기금의 동아시아 세계와 文祿・慶長의 役, 文禄・慶長の役(壬辰倭乱), 임진왜란과 강화교섭-쓰시마번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임진왜란기 일ㆍ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사명당(松雲大師)ㆍ加藤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 기사[144] 김시민이 이미 전사한 줄을 모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은 꼭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런데 한 설에 의하면, 당시 진주 목사였던 서예원이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잡혀 죽자 다테 마사무네는 그 목을 베어다가 김시민의 목이라고 소개하며 히데요시에게 갖다줬다고 한다. 다만 다른 설에 의하면 서예원이 명장은 아니어도 최소한 비겁하진 않은 용맹한 장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진주성으로 부임하기 전에 몇차례 전공을 세웠다던가 2차 진주성 싸움에 앞서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해) 온 가족을 진주성으로 불렀단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데 이건 김천일의 후손과 서예원의 후손들이 서로 자기 조상 자랑하고 상대방 조상 욕하는 내용이라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이긴 하다. 좀 더 연구가 되어야 비교적 확실한 결론이 나올 듯하다.[145] 진주성 방어에 나선 병력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고 있다. 입성자와 전사자 관련 기록을 비교 대조해 보면 입성해 방어전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없는 부대가 전사자 수효에 다수 포함되고 막 그렇다.[146] 진주성 공격 시기의 일본 육군은 초기 병력의 40% 가까이를 상실해 약 10만여 명 정도 남긴 했는데 이때 참전 영주들 관련 기록을 보면 영지에 충원 병력 보내라고 막 닦달하고 있어서 총 규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147] 일본의 '회본태합기'에는 비가 올 때 귀갑차를 사용해 성에 접근해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고 있다.[148] 조선시대 사료나 하멜 표류기들을 보면, 향토 방위는 승병들의 고유 의무였다. 추측건데 징병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남정네들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때 남자들이 믿고 마을을 맡기기에는 승병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마찬가지로 보부상들은 전시에는 척후병으로 징집되도록 되어 있었다.[149] 의병과 수군을 합치면 17만 5천이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력은 조선 정규군이었다. 의병은 보조적 역할을 맡다가 결국 정규군에 편입되었는데, 병농 일치 징병제 국가인 조선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 조선 후기부터는 모병제였다. 조선까들 중엔 17만이 장부상 기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조선보다 인구도 딸리던 고구려도 주필산 전투 때 15만을 모았고 고려도 2차 여요 전쟁 때 30만을 모았는데 조선이 17만을 못 모았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선조 때는 아직 조선이 세도 정치 시기만큼의 막장이 아니었다.[150]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북로남왜 중 북로인 몽골족의 추장이었다. 명나라와 화의를 맺는 과정에서 황녀를 맞이하지 않았다.[151] 참고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훗날 권력을 잡고 조일국교 회복을 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것도 이에야스가 마냥 평화주의적인 성격이라 사과했다기보단(물론 임진왜란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긴 했다), 일단 현실적으로 내전으로 황폐해진 일본으로선 보복하니 마니하던 당시 조선과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전쟁광 비슷하게 깎아내림으로서 도쿠가와 가문의 위상을 올리려는 포석도 있었다. 사실 이 사과란 것도 이에야스 입장에선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을 왜 나한테..?라고 할 수 있는 문제라, 결국 두 나라 사이에 낀 쓰시마번(대마도)이 국서를 위조함으로써 두 나라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줬는데 자세한건 기유약조 문서 참고.[152] 애초에 선조부터가 적에게 항복 혹은 휴전을 하자고 간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다만 명나라 사신과 황제가 그래도 협상은 해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은 것 뿐이다.[153] 당시 일본은 허수아비 덴노에 실권자 쇼군이란 막부 체제가 수백년 이어져오고 있었으니, 무식한 도요토미라면 진짜 조선의 정치 체계가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었을 확률도 아예 배제할 순 없다.[154]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다이묘의 서열대로 초기 명단이 작성되지만 일본 측이 정정을 요청하여 수정 후 제출되었다.[155] 다이묘로 삼는다고 했다.[156] 이 일을 기록한 책이 '일본왕환일기'이다.[157] 황신(黃愼, 1560~1617)[158] 명나라에서 순의왕(順義王)의 예를 따라 '순화왕(順化王)'으로 왕호를 정하려 했으나 전통적으로 일본의 지배자에게 책봉하던 '일본국왕'이 최종 결정되었다.[159] 법 등 제도를 고치거나 상, 벌을 내리는 명령.[160] 당시 교토에 머무르던 신부의 보고를 정리한 것이다.[161] 아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던 듯싶다.[162] KBS 팩션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등체강된 조선 왕과 똑같이 친왕의 붉은 곤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제론 이등체강되어 친왕 대우인 조선 왕과 다르게 삼등체강된 군왕의 대우로 책봉하고 관인이 내려졌다는 논문도 있다.[163] 이하 별폭 내용에 대해 실록 기사의 국역은 평어체로 되어 있으나, "천조에 바치는 별폭"[進天朝別幅]이므로, 본 문서에서의 번역은 경어체로 하였다.[164] 임진왜란 발발 전 황윤길, 김성일 등의 통신사 활동을 의미하는 듯하다.[165] 문맥상 '명의 하국이 된 일본의 마음'. 곧 명과 통교하고자 했었다는 의미.[166] 임해군, 순화군[167] 황신 이하 통신사가 명나라 사절보다 일본에 늦게 도착한 일을 이르는 듯하다.[168] 종전 이후 1599년 2월,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의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을 위해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169] 정유년 음력 7월 15일[170] 앞서 조선 수군에게 해전에서 당한 연패로 인해 특히 수군 쪽 전력이 강화되었다.[171] 양호가 서울을 떠나자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선조가 가서 붙잡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건 피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양호는 서울을 무조건 지키겠다며 확실하게 약속하기도 하는 등 개판이다.[172] 당시 기록인 선조수정실록 등에서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다시 피난을 가려고 했다는 식으로 실려있다.[173] 이 무렵, 시기상 10월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겨울이 머지 않았으므로, 보급 없이 계속 진격하다가는 그대로 고립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174] 엄밀히 말하자면 패한 건 아니다. 울산성 함락 및 전멸의 위기 직전에 일본의 구원군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전하긴 했어도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175] 다케다 신겐, 사이토 도산의 아들 사이토 요시타츠가 유명하다.[176] 운 좋게도 도요토미 세력과 대규모 내전을 두 차례나 벌여 승리한 덕택에 쫓아내야 할 다이묘가 산처럼 쌓여 있어서 줄줄이 개역을 시키고 토지를 빼앗아 지지세력들에게 나눠줬다. 물론 그렇다고 쫓겨난 다이묘들을 죽으라고 한 건 아니고 정말 가문 자체가 무가에서 사라진 사례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 극소수이며, 심지어 이시다 미츠나리도 본인만 참수했지 그 가족들의 신분은 박탈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전봉처분을 내려서 다른 데로 보내는 걸로 끝내거나 하타모토로 임명해서 최소한 먹고살 길은 마련해 줬다.[177] 공을 세운 사람의 석고를 높여주긴 하는데, 새로 복속된 봉토를 주는 것이다. 새로 복속된 봉토의 백성들은 당연히 기존 다이묘를 선호하지 이후 전봉되어 온 다이묘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잇키(농민반란)' 등이 일어나기 일쑤고, 이걸 핑계로 '학정을 한다. 땅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구실을 잡아 숙청하는 것이다. 이에야스도 이것에 당해 기존 세력권(미카와, 도토미, 스루가)에서 새로 복속된 구 호조 지배 지역(간토)으로 전봉되었다. 명목상 고쿠다카가 100만 석 이상 늘어난 수준의 엄청난 영전이었으나, 후호조씨의 지배를 오래 받던 간토는 문제의 여지가 엄청나게 많은 영지였으며, 히데요시는 이걸 이용해 이에야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숙청한 심보로 전봉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특유의 정치력을 보여 간토를 안정시켰고, 오히려 간토 전봉과 그로 발생한 손실과 위험성을 구실로 심아 임진왜란 출병을 미뤄버린다.[178] 히데요시 입장에서 이에야스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상대였는데, 이에야스를 모략으로 이겼을 뿐 힘싸움으로는 이기지 못했다(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거기에 히데요시 본인이 한 이에야스의 간토 전봉 조치 때문에 이에야스의 세력이 엄청나게 커졌다.[179] 규슈 정벌 직후라 가문이 쪼그라들어 땅을 더 얻을 필요가 있었고, 히데요시에게 잘 보일 필요도 있었다.[180] 실제 가토는 고니시의 집안이 과거 약장사 일을 했다는 이유로 고니시를 가리켜 걸핏하면 약장수라고 놀려댔고, 분노한 고니시가 칼을 뽑아들고 가토를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의 반목을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181] 결과적으로 보면 둘의 협조가 안 된 덕택에 고니시는 행주대첩을 제외하면 조선과 명의 협공을 거의 혼자서 감당해내야 했다. 그러고도 행주대첩 직후 기준으로 3분의 1의 병력을 보전하여 퇴각한 게 대단한 거지만 역으로 보면 그만큼 일본군의 각 부대간 협조가 안 됐다는 뜻이다.[182] 대마도는 일본과의 무역이 금지된 뒤에도 조선과의 교역을 유지했으며, 조선에서 식량을 사들여야만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식량 공급이 끊겼기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도 속출했을 지경이었으며, 물론 당시 일본도 조선에 끌려갔다가 죽은 사람이 엄청나서 사회에 미친 악영향이 상당했던데다 도요토미 사후 다시 혼란기였던지라 여기저기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그 참상은 대마도가 특히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소 요시토시 입장에서 보면 도요토미와 그의 가신인 고니시 때문에 자기 영민들이 비참하게 된 꼴인데,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이후 장인 고니시를 배신한 것이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런 점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183] 실제로도 조선 측에서 적군 4~5만 정도는 끄덕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부분이 있으며, 정말로 개전 후 7개월도 지나기 전에 일본군 4만 명 이상이 증발했다.[184] 고니시 군의 피해가 가장 큰 이유는 개전 초부터 조선군과 명군이 고니시의 군대만 주로 상대했기 때문이다.[185] 당시 니탕개는 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 변방을 침공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활약한 장수가 바로 탄금대의 신립으로 니탕개의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일조해 선조의 사돈이 되기까지 한다. 다만 선조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과는 별개로 실제 신립의 작전 수행능력에는 현재에도 의문점을 가진 이들이 많다.[186] 당시 순변사 이일이 이끌던 병력은 정예병이나 갑사가 아니라 급히 징집된 농민병들이다.[187] 압록강 4군에 주둔하던 정예 북방군[188] 다만 삼도근왕군의 대다수는 정병들 뿐 아니라 개전 이후 징집된 농민병들도 많았다. 와키자카의 군대가 보병이라 추격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군의 90% 이상은 생존했다고 본다.[189] 6진에 주둔하던 함경도 정예 병력이 해정창 전투에서 섬멸당한다. 하지만 이후 단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생존한 병력은 끊임없이 항전하였다.[190] 다만 해당기록은 구체적인 수치가 나온것이 아니라 그냥 20만 홍건적이 침략해오자 20만 군사로 격퇴했다는식으로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과장된 수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191] 동시기 인구가 1억이 넘던 인구대국 명나라가 장부상 총병력 300만과 대조적으로 실제로는 그 징집병조차 10~20만을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인것을 감안하면 조선쪽은 인구에 비해 대군을 모은것이다.[192] 이는 일본군도 마찬가지라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도 중복집계된 군사들 때문에 사료에 따라서는 20만, 30만 얘기까지 나온다. 심지어 풍신수길도 총동원령을 내렸을 때 일본군의 총 수효가 25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15만여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을 정도다.[193] 의병들은 게릴라전을 하거나 홈그라운드에서 소부대로 붙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과를 낸 것이다. 집단전에서 힘을 못 쓴 것이지 분대, 소대 정도로 붙으면 조선 농민 출신들이 일본군 상대로 근력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194] 다만 그렇다고 중국보다 화포가 더 발달했다고는 보기는 어렵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보는게 맞다. 화차나 비격진천뢰같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화기도 있었고 해전에서는 천자총통을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명나라군은 조선에는 없던 불랑기포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 물론 조선군도 명군이 불랑기포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전쟁이 끝나고는 대량으로 도입했다.[195] 그나마 동래 일대에서는 일본인들과의 교류로 구경 정도는 해봤을 수 있었다.[196] 그러나 조총 도래 이후 조선측의 교범이나 훈련 기록을 보면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멀게 잡고 있으며 조선군의 조총 운용은 화망 구성보다는 서구의 엽병 마냥 조준사격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197] 활의 훈련에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총과는 비교가 안 된다[198] 2차 금산 전투 같이 벌판에서 보병이 근접전을 벌인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임란 의병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삽질에 가깝다.[199] 일본에서의 공성전은 어지간하면 성을 포위하고 지원을 끊어 항복을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근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비즈니스 관계로 여겼기 때문에 정말 캐삭빵급의 대규모 충돌이 아니면 이런 식으로 세력을 흡수하는 것이 서로 이득이었다.[200] 애초에 쌍수도 자체가 왜구의 오오타치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201] 이때문에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활이 상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요동 정벌을 추진하던 시기가 여름이었다.[202] 습도 높으면 성능이 떨어지는건 창이나 칼같은 무기들도 그랬지만 조총은 성능히 떨어지는 수준이 아닌 아예 발사가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총이 그대로 터져서 총을든 병사가 죽어버리니 습도같은 날씨에 더 치명적이다.[203] 3단 사격으로 어느정도 극복을 할려고 했지만 조총은 3열이 전부다 조총을 쏘는데는 몇초면 끝나는 반면 조총을 쏘는데는 최소 30초 이상에서 ~1분 이상까지도 걸리니 그런 전수들을 사용해도 이런한 단점을 완벽히 해결하지 못했다.[204] 다만 명에서 청으로 교체된 중국은 정통 중국의 역사가 아니기에 경우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현대에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어 나라없는 민족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청나라가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며 명-청 교체가 만주족의 한족 식민 통치 시대가 아니라 중국의 내전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만주족이 오늘날의 몽골족처럼 나라를 가진 민족으로 남았다면 몽골족의 원나라가 정통 중국인 송나라를 정벌하여 지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청은 중국의 역사가 아닌 만주족이 한족을 정벌하여 지배한 역사로 평가되었을 것이며 이 경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도 조선이라는 국가는 꾸준히 유지했던 한국과 다르게 중국(한족)은 정말로 임진왜란으로 쇄락한 명이 멸망하고서 나라없는 민족으로 17~19세기를 보낸 것이 된다. 현대에 들어서 중국의 젊은 세대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이 아닌 근세에 멸망한 명나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에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205] 추가로 누르하치가 이끌던 건주 여진과 한국 전쟁 당시의 일본도 엇비슷하게 치환이 된다. 실제로 건주여진과 일본은 본 전쟁을 계기로 큰 국가적 성장을 하였으며, 당시 조선과 대한민국의 지도자이던 선조와 이승만이 각각의 군사적 지원을 거절한 것 역시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정전 협정에 있어서 당사국인 한국과 조선 대신 미국과 명이 대표로 나섰다는 점도 비슷하며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에 한국의 친미, 조선의 친명 성향이 더욱 강해져 미국과 명이 전쟁을 벌이는 경우 그를 도와 참전했다는 역사도 유사하다. 여기서 6.25 전쟁 정전 협정 당시 한국이 포함되지 않고 미국, 북한, 중국 3개국만이 협정에 서명을 한 것에 대해 전쟁의 주요 당사국인 한국이 무시를 당했다는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은 단독이 아닌 대한민국을 포함한 UN군 전체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협정에 서명을 한 것이다. 때문에 대한민국이 정전 협정의 당사국이 아니라는 북한, 중국의 역사 왜곡과 일부 한국인들의 오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206] 역사 학자에 따라서는 해당 전쟁을 일본의 제국주의를 수 백년 뒤로 늦춘 전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즉 한국이 일본 침략 방어에 실패했다면 일본의 팽창주의가 더욱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근대 역사에 있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상하던 중국 진출, 인도 침략, 동남아시아 정복은 대한제국의 병합으로 본격화된다.[207] 해당 작품은 도요토미 사후 일본의 후계 구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208] 일본의 고문체는 조선 / 중국의 문체와 한자의 배열이 다르고 일본식 구결(가나)이 섞이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이해가 굉장히 힘든데, 이익은 이 글을 한 자 한 자 다 따져 보면서 글자를 재배열해서 번역했다.[209] 일본 고미즈노오(後水尾) 덴노의 연호. 1615년 ~ 1624년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겐나'.[210] 겐나의 역, 즉 1615년의 오사카 공방전을 말한다.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킨 전투이다. 덧붙여 원화라는 연호는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에 변경된 연호인데, 일본에서 완전히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바꾼 연호다. 그래서 전국 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원화언무(元和偃武, 겐나엔부)'라는 말이 있다.[211] 예수회 선교사제들의 일반적 인식은 다음을 근거로 한다.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혜경(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212]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잠비크 출신의 노예로 '흑인 사무라이'로 유명한 야스케를 소개한 인물이다.[213] 임진왜란 때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종군 신부로 조선에 왔으며, 일단 교회사에서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 신부로 남아 있다.[214] 예수회 선교사 중에 프란시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 같은 경우는 기존의 예수회 선교사들과는 달리 일본 고유 문화들을 전부 야만스러운 것으로 간주해 금지하려 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이래로 일본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도나 설교할 때 승려처럼 가사를 입고 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었다. 육식을 즐기지 않던 일본인들의 식습관도 프란시스코 카브랄에게는 '야만스러운 것'으로 교정의 대상이었다.[215] 라기보다는 그냥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 국가와 무역 자체가 없었다.[216] 이런 강경한 조치도 바테렌 추방령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217] 이에 반발해서 일본 내에서 기리시탄들이(그리고 도쿠가와 정권에 반대하는 옛 히데요시 정권의 가신들 및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 규슈 서남쪽에서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며 포르투갈 본토의 원조를 받으려 했을 때, 에도 막부는 시마바라에 병력을 투입하는 동시에 네덜란드 상관장에게 군함을 지원받는 것으로 응수해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218] 다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겉으로만 불교 신자인 척하면서 실은 무신론자라고 자신의 일본사에서 깠다. 애초에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육손이라느니 악덕에 오염되어 있다느니 까면서 오토모 소린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는 엄청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그 점을 감안하고 그가 남긴 글을 읽을 필요가 있다.[219] 기독교인 다이묘들의 경우 자신의 영지 내에 있는 신사나 사찰을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헐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220] 정확하게는 히데요시 자신에 대한 반대파.[221]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222] 세례명은 돈 프로타시오(Don Protasio).[223] 세례명은 유스토(Justus).[224] 세례명은 돈 프란체스코(Don Francisco).[225] 세례명은 돈 바르톨로메오(Dom Bartolomeu).[226] 세례명은 레온(Leon) 또는 레오(Leo).[227] 시코쿠의 토사 이치죠 씨의 당주인 이치죠 카네사다도 기리시탄이 되어 돈 파울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하리마의 쿠로다 요시타카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리시탄이었다.[228] 포르투갈을 뜻하는 불랑기와 포를 더한 합성어[229] 오토모 소린 같은 경우는 아예 불랑기포의 제조 기술까지 자체 보유하고 있었다.[230] 예수회 소속 초대 일본 준관구장이다.[231] 가스파르 코엘료는 이미 이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인 덴쇼 13년(1585년) 규슈의 키리시탄 다이묘들과 이들을 앞세운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 활동을 지원하고자 루손(필리핀)에 일본으로의 함대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232] 하라 테츠오의 만화 꽃의 케이지에서는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다가 할복하는데, 센노 리큐가 조선 침략을 반대한 것은 에스파냐 열강 선교 세력 즉 예수회의 암약으로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등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공하고 이를 시작으로 해서 최종적으로는 일본을 이용하여 동양 전체를 식민화하려는 열강의 음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라는 이유가 붙어 있는데, 어디까지나 만화적 과장이고 창작이 가미된 설정이기는 하지만 본 항목에서 소개하고 있듯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나 예수회 본국인 포르투갈, 에스파냐가 중국을 자신들의 '콩키스타도르'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었고 선교사들이 히데요시의 중국 공격 계획에 찬동하면서 앞장서서 지원 의사를 밝혔던 것을 보면 아주 허무맹랑한 설정도 아니다.[233]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제1권, 224~226쪽[234] 전과자 등 도덕적으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사제 심사 과정을 통과하고 사제가 되는 것만큼이나 기독교 신학교에서 더 문제로 삼는 것이 '판단력'의 부족이다. 교리 해석을 잘못해 곡학아세를 벌이거나 믿음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사회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해서 지탄을 받고 교회를 말아먹거나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제나 신학생에 대해 '판단력 부족'이라고 하는 게 기독교 신학교에서는 가장 심한 비난 중 하나라고.[235] 심지어 그걸 팔아먹는 인간도 일본인 즉 기리시탄 다이묘들이었다.[236]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기 전날에 가스파르 코엘류에게 보내 힐문한 내용에 "기리시탄들은 왜 함부로 소나 말을 식용이라고 마구잡이로 도축해 먹느냐"라고 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237] 히데요시 본인만 해도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밑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종교 집단이 세속의 정치 권력에 얼마나 위협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진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까다로운 일인지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 엔랴쿠지의 소헤이 제거를 위해 히에이 산을 불태우고 이시야마 혼간지나 이세 등 일본 각지에서 벌어지는 잇코잇키를 힘들게 진압해 나가는 과정들을 옆에서 보면서 몸소 체험했던 인물이다.[238] 유럽에서 태평양 건너 먼 길 오는데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이 뭐 어떻느냐고 기독교 신자들은 반발할지도 모르지만 콩키스타도르 과정에서 신대륙 및 동남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히데요시의 예수회, 기독교에 대한 위기감이나 불쾌감이란 그가 살아온 센고쿠 시대의 감성이나 환경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히데요시의 이러한 경계심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편집증적인 망상이나 흔히 반기독교주의자들이 가지는 반기독교적인 배타성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다.[239] 출처: 윤재필 《16세기 예수회의 일본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및 조용준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240] 전쟁 초기에는 현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조선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여 조선을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 취급했지만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직면하면서, 전략 목표가 이전보다는 현실적으로 수정되었다.[241] 일본 내에서는 우익 성향을 중심으로 전쟁 도중에 일본의 절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이 조선에서 철군했을 뿐이라며 조선이 승리한 전쟁임을 부정하고 애둘러 역사왜곡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명백하게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황에서 지도자 1인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점령한 영토를 그냥 두고 철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비추어보아도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패색이 짙어져서 일본 내에서도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던 상황에서, 전쟁을 고집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이를 명분으로 철군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다. 철군 조차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추격해온 조명 연합수군에게 응징을 당했다. 국내외 역사학자들도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승리한 것으로 본다.[242]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의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조선을 도와 참전한 명나라도 결국 이 전쟁에서 소모한 국력이 몰락원인 중 하나가 되어 멸망했으므로 완전한 승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으나 피해 정도나 전쟁 이후 정권의 존속여부와 전쟁의 승패는 무관하다. 세계사적으로도 침략군이 방어하는 쪽에 밀려 퇴각하면 해당 전쟁은 방어 진영의 승리고 침략국의 패배로 본다.[243]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내용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조선 조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나 일이 꼬이는 것을 원치 않아 묵인했고, 대마도주의 조작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에도 막부도 결과적으로 묵인하면서 근대까지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다.[244] 창덕궁과 창경궁은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 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245] 정확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비변사등록은 광해군 9년(1617)부터.[246]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직후에도 수천의 기병으로 원정을 나가는것을 보면 조선의 국력이 그리 허약하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단지 왜군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247] 전쟁 후 선정된 선무일등공신 3명은 모두 당시에 사망한 인물들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 권율은 전란 종료 후 1년이 지나 사망하며, 원균 역시 죽었다고 공표된 인물이다.[248] 무신정권이 아니라 이성계와 최영 등등을 말한다.[249] 실질적으로 15~16세기 호적자료는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시기의 노비비율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노비비율을 높인 사건인지 낮춘 사건인지 의견이 서로 갈릴 수 밖에 없다.[250] 당시의 주요 상인들은 자본의 몇 곱절에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고, 이것은 독점적 민간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251]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불교로 개종하여 출가를 하는 그 순간 천민으로 떨어질 정도로 경멸당했다.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을 실록에 실었다.[252] 실제로 명나라는 이후 재조지은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사신들의 개인적인 뇌물 받기, 모문룡의 행패 등이 겹쳐 현대 한국에서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253] 특히 사르후 전투와 송산 전투에서 청군에 참패하여 청에 대한 예방 전쟁이 불가능해졌다.[254] 일례로, 이순신에게 주력 함대 대부분 잃었고, 이를 운용하던 숙달된 선원들을 상실하면서 왜구 등을 통해 대대로 확보해온 항해술과 해상 전투 기술이 실전되었다. 사실 전쟁이 나면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군의 실질적인 운용을 책임지는 중간지휘관들, 장교단의 상실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군은 수전 조련에 능한 우수한 장교단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의 해군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제국 해군을 건설하기 전까지의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도요토미 시대만큼의 해상 전력을 갖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대외 진출용 선박의 건조가 대부분 금지된 것도 한몫했다.[255] 일본도 중앙 정부가 그나마 강력하던 헤이안 시대 이전에는 육국사로 불리는 정사 역사서가 있지만 전국 시대 무렵에는 중앙 정부가 이미 무력해졌다.[256] 한국에서는 실학의 영향으로 청나라가 개방되고 진보적인 국가였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청나라는 중국 왕조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폐쇄적인 무역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던 왕조이다.[257] 이 정신나간 세율 때문에 마비키라는 악습도 생겨날 정도였다.[258] 당시 막대한 생산량을 자랑하던 은광은 대영주들의 차지였고, 도자기 산업의 경우에는 임란 이후 조선인 도공들이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일천했다.[259] 소설가 오세영이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쓴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흥포(興浦)'라는 명나라 상인이 그림의 실제 모델 혹은 모티브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동양인과 조선인 노예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260] 오히려 전투는 물론이고 장수이름까지도 한국인이 더 잘 알 정도.[261]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 시점에서의 노량 해전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되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피로스의 승리로도 볼 수 있다. 다만 노량 해전 당시 일본군이 일본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의 정도가 피로스의 승리라고 보기에도 너무나도 컸음을 감안하면 그냥 일본의 정신승리에 가깝다.[262] 일본 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숫적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 그 외에도 한국사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히는 원균의 칠천량 해전도 임진왜란에서 벌어졌다.[263] 출처: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43~145쪽[264]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265] 대력강용하다고 평가받는 녀석이다. 그 류조지 타카노부의 차남으로 하스이케 성의 영주이자, 아버지의 명으로 에가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에가미 가문을 먹어치운 녀석이다. 심지어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후계자인 나베시마 카츠시게를 양자로까지 데리고 있었던 녀석인데.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 있었다[266]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경우 초기에는 군대가 국가가 아닌 부족의 소속이었다가, 중원 입관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중국화되면서 관료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점차 명나라와 비슷하게 군인이 국가의 소속인 경향이 강해졌다.[267]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인 녹둔도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고 백의종군 또한 함께 했다.[268] 본래는 주격 조사로 '이'와 그 이형태인 'ㅣ' 및 'Ø(영형태)'가 쓰였으나, 이 중 '이'만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 쓰게 되었고 체언에 받침이 없을 때 쓴 'ㅣ'와 'Ø'의 역할을 '가'가 대신하게 되었다.[269] 조선왕조실록 선조 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여기에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이라고 기록되었다.[270] 일본인들은 Tobacco를 담박괴’(淡泊塊)라 음차표기 했는데, 이게 한국에서 담바귀로, 그러다 담배로 정착되었다. 고추는 일본군이 생화학 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담배는 동래 인근에 많이 심었다.[271] 그런데 여기서도 다른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상기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추가 16세기 ~ 17세기부터에나 수입되었고, 그 짧은 기간동안 고추장은 물론이고 지역별로 가지각색인 지역 고유의 김치들이 불과 2세기, 3세기만에 생겨나 정착했다는 말이 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 시대 당시 기록에 고추를 일본(왜)에서 들어왔다고 왜초(성호사설), 왜자개(지봉유설) 등으로 부르는 것이 남아있고, 궁중 요리에서는 고종 재위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고추를 잘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결정적으로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 원산인 작물이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1492년 이전에는 구대륙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272] 이런 걸 보면 선조가 마냥 암군은 아니고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난 걸 알 수 있다.[273] 다만, 류큐는 국력의 한계로 과연 충분한 군대를 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걸 제쳐두더라도 태국의 경우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웃국가이자 강대국인 버마의 대규모 침략을 여러차례 받아 수도 인근에서 왕이 직접 친정하여 대규모 회전을 벌였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때문의 전근대 시절 운송, 보급의 한계로나 당시 국난이었던 자국 형편에 대해 회의적인 지적이 부흥에 올라왔었다.[274]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를 말한다. 후금을 세우기 전에도 이미 그 지역의 실력자였고 사실상의 지배자였다.[275] 이 내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인터넷 상에서 떠돌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나라가 명나라 포함 10개국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나라 이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명나라, 파랑국에 위에 언급된 아유타야(태국), 류큐, 여진에다가 몽골, 천축(인도), 월남, 참파, 버마 등을 포함했다.[276] 금선자 이언휴는 산에 묻혀 도를 닦는 사람이였는데 전국 방방곡곡과 일본 일부를 돌아다니며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사전에 침투한 일본의 스파이들의 존재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고 훗날 요동을 둘러보며 명나라의 쇠망과 만주족의 발흥을 예견했다고도 한다. 이미 상술했듯이 당시 조선 정부에서 곧 전쟁이 날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와 소소한 준비가 있었기에 어떤 초인적인 능력이나 도술을 부려 미래를 예견했다기보다는 금선자 개인이 이런 분위기에 맞춰 주변 정세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탐방을 하며 일종의 정보분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277] 영국의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도 이 말에 낚이기는 했지만 도리어 '3천년간 무패였어? 그럼 이번엔 깨질 때가 됐네.'라는 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자신감을 보였다. 진주만 공습 덕분에 참전에 회의적이던 미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278]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에 여럿 참전했으나 대부분 주장(主將)이 아니라서 세간에 덜 알려졌다. 주요전투에 참전할 때의 관직이 모두 다른지라 전부 표기. 1592년 전라도 수군 절도사로 한산도 대첩에 참가, 1593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행주대첩 참가, 1594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장문포 해전에 조력. 1598년 2차 울산성 전투 당시 부원수 겸 황해도 병마 절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