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도가 제일 선명했던 그 순간 2014년 10월, 미국 출장 기간 중 처음으로 사이클로크로스를 경험했다. 우리 그룹은 한 스무 명 정도 되었고, 출발 직전부터 사이좋게 물은 챙겼는지, 튜브는 몇 개 가지고 있는지 서로 점검을 해주었다. 오늘은 라이딩 중간에 사이클로크로스가 있다는 안내를 받았었고, 나는 글과 사진으로만 봤던 사이클로크로스를 처음으로 직접 해보는 상황이라, 일사천리로 준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도움을 받았다. 지혜는 자전거를 뭘 가지고 갈 거냐, 튜브는 내가 여러 개 있으니까 걱정 말아라 등 주변에서 든든하게 지원했다. 여기까지는 그냥 산 타러 가기 전 준비 태세와 흡사했기에, 나는 감흥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뭘 저리 유난스러운지'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로드 클릿 끼운 것을 안 바꾸고 잘 탈 수 있다고 으스댔는데, (아마 이 친구는 자전거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레이스 이후 신발 안에서 발이 다 까져서 며칠 동안 고생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그룹엔 인솔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등에 플로어 펌프를 둘러메고 전기자전거로 써포트 했다. 20km 정도 도심과 포장이 열악한 도로를 달렸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이때 라이딩의 반이 끝난 줄 알았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충분히 달렸기에, '이게 사이클로크로스인가. 싱겁구만. 이제 물 마시고 쉬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하나 둘씩 물통을 땅에 버렸다. 로드 클릿으로도 레이스 할 수 있다던 그 친구의 얼굴엔 '망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만 CX 경주가 처음은 아니었나 보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줄 알았다. 누가 이리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일동 차려 자세로 물통을 땅에 떨어뜨렸을 때가, 내 기억 속 가장 해상도 높은 순간이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처럼 | 2014년 10월 | 출처, 사장2의 스마트폰 전체 그룹 스무 명은 10명씩 A팀, B팀이 되었다. A팀이 코스를 주행하는 동안 B팀은 코스에 비둘기처럼 앉아서 환호 보내는 갤러리를 맡는 방식이었다. 한 그룹이 얼굴에 진흙이 튀어 너덜너덜하게 달리는 동안 옆에서 '더더더더 더!!! 가즈아!!!!!!!'를 목청껏 외치는 것이다. 이날 나는, 자전거를 타는 시간보다 들고뛰고, 진흙이 범벅이 된 자전거를 밀어올리는 상황이 더 많았고, 신발은 다행스럽게도 엠티비 플랫화를 신어서 걱정이 없었다. 이날 펑크는 (정확히 몇 번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그룹 내에서 수차례 있었다. 여기저기서 나도 펑크, 너도 펑크를 외쳐댔다. 인솔자는 가져온 플로어펌프로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튜브를 갈았다. 사이클로크로스는 코스가 짧고, 어차피 탈 수 있는 곳 반절, 못 타는 곳 반절이라 펑크가 나면 다들 자전거를 들고뛰었다. 튜브 정비는 레이스 이후,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갈 때 했었다. (나는 타기 반 들기 반이었지만, 산악자전거 내공이 높은 친구들은 70-80% 정도 타고 나머지는 들고뛰었다. 하하) 나를 포함한 세 네 명을 빼고는 다들 이 상황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한 달 전쯤, 랩에 트렉의 체크포인트와 팔리의 치바코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 로드 형상에 산악자전거에 낄 법한 오돌토돌 블럭 타이어가 달린 것을 보고 '캬- 역시 이런 게 자전거지'라는 마초 향기 뿜는 참새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것이 사이클로크로스인 것 같다며 랩주인들에게 물어보는 친구들도 많았고. 이건 CX는 아니고, 그래블이라고 말하면 '그게 뭔가요'라고 갸우뚱. 조금 사족을 덧대자면, 사이클로크로스는 (사장2의 기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에서 2014년 사이에 유행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CX 레이스가 잠깐 생기려는 조짐이 보이기도 했었다. 대회가 있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었던 듯했다. 그럼 그래블이라는 장르는 뭘까. 마케팅의 농간인가. 사이클로크로스 예시 | www.trekbikes.com 외관은 기능을 따른다 사이클로크로스는 레이싱을 기본으로 한다. 드롭바가 달린 프레임으로 짧은 오프로드 코스를 주행하며, 대개 공원이나 비슷한 장소에서 레이스를 한다. 코스 안에는 진흙, 모래밭은 기본이고 장애물도 있고 계단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자전거로 올라가거나 내려가기 무서울 정도의 가파른 경사도 있다. 코스 자체가, 라이더가 자전거를 들고뛸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보통 한 바퀴에 2.5km에서 3.5km 정도이고, 엘리트 등급은 한 시간 정도 지속한다. 그래블 예시 | www.quocpham.com 그래블 예시 | www.quocpham.com 요즘에는 그래블도 레이스가 있어서, 경기 규칙 같은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블/어드벤쳐 장르의 자전거를 경기를 빨리 마치는 데에 특화 시킨 스펙으로 설계하지는 않는다. 그래블은 광폭의 뚱뚱한 타이어와 적재 시스템, 편안한 라이딩 포지션. 이 세 가지를 충족한다. Parlee Chebacco | 타이어 클리어런스 40c까지 | 사진 스펙은 700x36c Trek Checkpoint | 타이어 클리어런스 45c까지 | 사진 스펙은 700x35c Frame! 사이클로크로스 프레임은 모름지기 가벼워야 한다. 자전거를 모시고 가야 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고, 기록도 잘 나와야 하니까. 그렇기에 사이클로크로스는 알루미늄을 가볍게 가공한 프레임이나 카본 소재의 프레임을 보통으로 친다. 사이클로크로스와 그래블은 지오메트리도 다르다. 사이클로크로스는 대개 헤드튜브 각도가 72-73도이다. 민첩한 조향을 위해 헤드튜브가 살짝 서있는 느낌이라면, 그래블은 그보다 각이 누워있다. 그래블 라인업의 헤드튜브 각도는 71-72도 정도이다. 머드가드를 설치할 수 있는 포크 중앙의 아일렛 | 트렉 체크포인트 머드가드와 랙을 설치할 수 있는 옆면 아일렛 | 팔리 치바코 다운튜브 안쪽 면에 물통 케이지 두 개 다운튜브 아래면에 물통 케이지 하나 더 | 험한 지형 라이딩을 걱정 없이 할 수 있도록 덧대기, 카본의 아머 일반적으로 그래블/어드밴쳐의 체인스테이 길이가 더 길다. 패니어를 비롯한 러기지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래블은 체인스테이가 길고, 사이클로크로스는 체인스테이가 짧다는 이 공식이 모든 제품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 체인스테이 길이가 뭐가 대수인지, 의문스러울 참새들을 위한 첨언. 사이클로크로스도 머드가드와 랙을 설치할 수 있는 아일렛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직 레이스만을 위해 자전거를 구입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제조사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트렉 체크포인트 | 체인링 50-34 | 카세트 11-34 팔리 치바코 | 체인링 50-34 | 카세트 11-34 Gears! 전통적인 사이클로크로스의 레이스 기어는 46/36T 크랭크셋에 11-28T의 미디움 와이드 카세트를 사용한다. 로드처럼 높은 기어비를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속 70-80km로 다운힐을 내려갈 일도 없다. 하지만, 언덕을 위해 꽤 낮은 기어비가 꼭 필요하고, 어떤 코스든 올라갈만 하도록 기어비를 설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어드밴쳐/그래블 바이크는 사이클로크로스보다 더 넓은 기어비를 쓴다. 하지만 아주 높거나 아주 낮은 기어비를 쓸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크랭크는 대개 50-34T, 카세트는 11-32T(또는 34T)를 주로 사용한다. 어떤 그래블에는 48-32 크랭크셋이나, 42-38을 쓰기도 하고, 더 간결한 기어비를 추구하는 이는 1x11 시스템을 쓰기도 한다. 만약, 한 15년 전, 또는 그 이상 산악자전거나 투어링 자전거를 탔던 사람이라면 그래블/어드밴쳐에 3단 체인링을 쓰지 않는 것에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써보면 알게 될 것이다. 3단 체인링을 쓰면 더 많은 기어비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중 유용한 기어비의 폭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최소 42/28T 체인링과 11-36 카세트 정도면 진짜 넓디넓은 기어비를 가질 수 있다. Brakes! 한때 사이클로크로스도 UCI에서 디스크브레이크 사용을 허용하지 않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블/어드밴쳐 카테고리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요즘은 그래블/어드밴쳐, 사이클로크로스까지 모든 장르에 디스크브레이크는 당연하게 사용한다. 제동능력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젖은 노면에서도 제동을 걱정할 일이 없다. 특히 노면이 엉망진창일 때 디스크브레이크는 빛을 발한다. 림에 데미지를 주지 않고, 브레이크 캘리퍼에 이물질을 걱정하지 않고 브레이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타이어를 쓸 수 있는 것도
전부 이 디스크브레이크 덕분이다. Gravel! 순수한 사이클로크로스 전용 자전거는, 아주 좁고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다. 사이클로크로스는 그 레이싱을 위해서는 빛나는 선택이지만 머드가드, 랙 등을 장착하고 기나긴 라이딩을 준비하는 라이더에게는 사이클로크로스가 비슷해보이지만 많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기어비도 넉넉하지 않고, 뚱뚱한 타이어도 쓸 수 없기에. 사이클로크로스의 라이딩 포지션은 다소 공격적이라 한두 시간은 괜찮겠지만 온종일 트레일을 달리기에는 썩 좋다고도 할 수 없다. 물론 자세를 버티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라이딩 능력치에 달렸지만 말이다. 그래블/어드밴쳐는 사이클로크로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으며, 산악자전거만큼 두꺼운 타이어를 장착하고, 투어링자전거만큼 넓은 기어비를 가진다. 하이브리드, 피트니스 자전거인 FX 시리즈만큼 하루 종일 라이딩을 해도 편안한 포지션이다. 간단하게는 출퇴근부터, 복잡하게는 여행, 캠핑과 임도를 포함한 라이딩 활동까지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는 카테고리가 출현했다. 물론 제품이 나타나기 전에 많은 수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하하 *참고자료 | http://road.cc/content/buyers-guide/205556-cyclocross-bikes-v-graveladventure-bikes-whats-difference 다음 이야기는, 트렉의 그래블라인업 '체크포인트'와 팔리의 '치바코'가 두둥- 두 번째 세 번째 자전거는 그래블이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