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가족 근황 - gimjaegyu gajog geunhwang

 

김재규 가족 근황 - gimjaegyu gajog geunhwang
 국회 정보위의 국정원 국정감사가 21일 국가정보원에서 열렸다. 국정감사장에 걸려있는 역대 기관장의 사진중 8대 김재규 중정부장부터 칼라사진이다. 오른쪽끝은 10대 전두환 전대통령의 중정부장 시절.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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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군대생활(초기)이 평탄하지 않았듯이, 그의 가정생활도 평온하지 않았다. 부모가 맺어준 첫째 부인과는 입대하고 얼마 뒤 전쟁이 터지면서 부대이동이 잦고, 따라서 부부생활을 할 겨를이 없었다.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던 이 여인과는 10여 년 동안 이혼 정리가 안 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물론 딸린 자식도 없었다.

1952년 소령으로 진급한 김재규는 전남 여수의 제2보충연대장으로(여수지구 계엄사령관 겸임) 부임했다. 아직 전시 중이어서 지역의 계엄사령관은 막강한 위치였다.

어느날 육사 동기생이 순천의 유지 김완근(金完根)의 셋째딸 김영희(金英熙)를 소개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4학년 재학 중 순천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미녀였다. 당시 대학 4학년이면 졸업 전에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것은 관행이었다.

김영희의 집에서는 사윗감이 군인이라는 데 별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1948년 10월에 여수ㆍ순천에서 일어났던 국군 제14연대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신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1952년 봄 화촉을 밝혔다. 부인은 이듬해 딸 '수영'이를 낳았고 이후 아이가 없었다.

"김영희 여사는 '수영'을 임신했을 때 입덧이 하도 심해 10개월간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고생하여,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했는데, 수술이 잘못되어 자궁내막염을 앓아 그 후 임신을 영구히 할 수 없었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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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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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26거사 후 전두환이 주도한 계엄사령부는 김재규를 부패ㆍ부도덕한 인물로 몰기 위해 각종 '자료'를 공개했다. 그중에는 그가 축첩하고 억대의 주택을 구입해 주었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계엄사 발표문이다.

또한 김재규는 68년 8월 경 당시 요정 '도성' 주인인 유부녀 장정이(張正伊)와 통정, 장의 본남편과 이혼케 하고 소실로 삼아 1억 6천만 원 상당의 가옥을 구입해 준 것을 비롯, 2억 7천만 원의 공금을 유용 축첩에 탕진했으며 주위로부터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일과시간을 이용, 첩과의 환락을 즐겨오는 동안 그 사이에 자식 2명이 출생하여 외부에 누설될 것을 우려해 어린 자식을 놓고 친자여부 혈액검사를 하는가 하면 사생아로 호적에도 입적시키지 않는 비도덕적 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주석 2)

계엄사의 발표문과는 크게 다른 기록을 소개한다. 먼저 장정이 여인을 만나게 된 과정이다.

김재규 소장이 장정이 씨와 실질적 관계를 맺은 것은 보안사령관 시절이라고 당시 보안사에서 문관으로 근무했던 이종도 씨는 주장했다. 당시 연합통신에 보안문제가 걸려서 시끄러웠는데, 장경원 한국일보 사장이 중재를 맡아 김재규 보안사령관, 김석원 쌍용시멘트 회장 그리고 장경원 사장 등 3명이 함께 종로의 '도성'에서 화해술을 마셨다. 김석원 회장이 장 여인에게 김재규 사령관을 잘 도와주라고 부탁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재규 사령관은 장정이 씨를 알고 나서, 장 여인이 보통 술집 여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김재규 사령관은 장정이 씨를 단순한 연애 상대로만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장정이 씨가 당시 40세 정도였는데, 김 사령관이 연애의 맛을 원했다면 장 여인이 경영하는 요정에 젊고 예쁜 20대의 고급 접대부들을 상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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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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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와 관련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었던 사생아 문제에 대해서도 상반된 내용이다. 장 여인은 얼마 후 아들을 낳았고, 주변에서 김재규의 자식이라고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에 참다 못한 주변 사람들은 정보부 감찰과장 조 모씨를 시켜 아이의 피를 검사케 하고, 인천지법에서 그 아이(김ㅇㅇ)는 김재규 정보부장의 아이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 낸 것이다.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그 아이에 대해 애착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김재규 사령관은 장정이 씨가 아이를 낳고 난 후 혜화동 소재 옛 보성중ㆍ고교 앞의 ㄱ자 기와집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 아이가 피검사 결과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간 자신의 아이로 알고 사랑해 왔으므로 "그 아이가 나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고아도 키우는데 내가 보살펴 주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기도 했다. 김영희 여사는 "그 아이가 김 장군의 아이라면 내가 키울테니 달라"고 했는데, 장정이 씨는 "그 아이는 김 장군의 아이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 사령관이 장정이 씨에게 준 것으로 알려진 '기와집'은 실은 장 여인에게 준 것도 못 되었다. 김재규 사령관이 장정이 씨에게 그 집을 넘겨주고, 그 집은 곧바로 그의 아우 김항규 씨가 경영하던 서진기업의 계열 회사인 모 무역회사가 은행융자를 받는 데 담보로 잡혔고, 그 무역회사는 도산하여, 그 집은 다시 1천만 원에 경매 처분되어 이상윤 씨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장정이 씨는, 10ㆍ26 사건으로 김재규 정보부장이 잡혀가자, 끌려가 3년간 옥살이를 하고, 현재 강원도에서 아들 ㅇㅇㅇ과 함께 숨을 죽이며 살고 있다. (주석 4)

 

당시 정ㆍ관ㆍ재계는 물론 군부요인들도 고급 요정에 출입하면서 막후 정치와 각종 이권을 주고 받은 이른바 '요정정치'가 판치던 시절이다. 술판에는 접대여성들이 끼었고, '2차'로 가는 곳이 호텔이었다. 사생아들이 생겨나고 정ㆍ관가에 화젯거리가 되었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지나갔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실시한 DNA검사여서 얼마나 정확한 검사 결과였는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전두환 계엄사는 펙트조차 다르게 공개하고 그를 패륜자로 몰았다.

주석
1> 오성현, 앞의 책, 75쪽.
2> 『한국일보』, 1979년 12월 8일자.
3>  오성현, 앞의 책, 74~75쪽.
4>  앞의 책, 7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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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5월27일 김재규 부장의 여동생 김정숙씨가 파주 자택에서 가족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씨의 장남 김성신씨가 든 사진은 김씨의 남편 김양환씨가 중앙정보부장 관사에서 김재규 부장과 함께 찍은 것이다.

1980년 5월24일 새벽,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직후, 셋째 여동생 김정숙의 서울 잠실 자택에 전화벨이 울렸다. 중정 최종대 비서가 비통한 목소리로 “부장님 방금 떠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충격을 받고 전화기를 떨어뜨린 김정숙은 자지러지듯 어머니를 불렀다. 김재규 부장의 모친인 권유금 여사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하늘 아래 있고 싶어 당시 고향 경북 선산에서 올라와 잠실 딸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딸의 외마디 비명과 통곡을 듣고 권 여사가 엄숙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울지 마라. 자고로 효자에게는 불충이 없는 법이다. 네 오라비 그렇게 불충한 사람 아니다. 오라비가 한 일은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튿날 김정숙씨 부부는 큰오빠의 시신을 인수하러 다른 형제들과 합수부에 들어갔다. 함께 사형당한 4명의 부하(박선호·유성옥·김태원·이기주)와 한자리에 묻어달라고 한 생전 오빠의 유언에 따라 유가족들이 상의에 들어갔다. 합수부 수사관이 이 장면을 상부에 보고하자 발칵 뒤집혔다. 전두환 합수부는 사형시킨 김재규와 부하 4명의 시신을 강제로 경기도 광주, 의정부, 동두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서 매장시켰다.

이후 김재규 부장 유족에게 닥친 날들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부인 김영희 여사는 합수부에 끌려가 말로 표현 못할 고초를 겪고 집과 재산마저 다 빼앗겼다. 그나마 김재규 부장의 장인이 전남 순천에서 꽤 재력이 있는 유지였다. 그는 딸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물려줘 사위의 유언을 지키도록 했다. 김영희 여사는 1990년대까지 남편의 유언에 따라 사형당한 남편 부하의 자녀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했다.

10·26 당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김재규 부장 바로 아래 동생 김항규씨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집과 회사 등 모든 재산을 헌납한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목숨만 부지한 채 풀려났다. 이후 폐인이 되다시피 한 채 경북 봉화의 한 사찰로 출가했다. 김재규의 다른 형제자매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숨죽여 살아야 했다. 교수 부부였던 두 여동생 내외는 전두환 신군부의 등쌀에 환멸을 느껴 미국으로 떠났다. 10·26 당시 현역 육군 대위로 큰형 김재규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막냇동생 김영규씨는 군에서 요주의 인물로 취급되었다. 무기를 다루지 않는 부서로만 전전하는 ‘특별대우’를 받았던 그는 대령으로 군복을 벗었다.

10·26 이후 유족은 입이 있어도 벙긋하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아왔다. 아직도 대부분의 10·26 사건 가담 유족들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 부장 셋째 여동생 김정숙씨(82)가 오빠의 40주기를 맞아 유족을 대표해 ‘김재규 형사사건 재심 청구인’으로 나섰다. 유족 가운데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김정숙씨를 파주 자택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아들 김성신 교수와 남편 김 양환씨가 함께했다.

40년 만에 김재규 부장 재심을 청구하게 된 배경은?

이번 재심은 유족이 갑자기 의도해서 신청한 것이 아니다. 〈남산의 부장들〉 영화가 나오고, 보안사가 10·26 재판 당시 몰래 녹음한 전체 녹음파일을 언론에서 발굴하고, 이걸 민변 변호사님들이 받아 재심 사유가 된다고 나서주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결정한 일이다.

그동안 오빠의 명예회복 염원이 강했을 텐데.

10·26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적어도 ‘전두환이 말한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널리 알려지기 바랐다. 10·26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상황은 덮어둔 채 오직 오빠가 대통령이 되려고 패륜을 저질렀다는 천박한 공격에는 가슴이 아팠다.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인가?

사형당하기 전날인 5월23일에 마지막으로 면회 갔다. 바로 다음 날 사형당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합수부가 그날 우리 형제들을 오전 오후로 나눠서 면회시켰다.

10·26 사건 재판 초기에 합수부가 가족에게 ‘재판 거래’를 제안했다는데?

둘째 오빠(김항규씨)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간 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나와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합수부가 ‘김재규 사선변호사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가족을 하나씩 불러 작살내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었다. 큰오빠(김재규)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큰오빠는) 가족을 지키는 문제로 고심하셨고 결국 본인 육성으로 법정에서 10·26 정신을 설파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결국 4차 공판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변호사를 안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국선변호사 체제로 바뀌었지만 안동일 변호사 같은 국선변호사가 더 열심히 변론했다. 작은오빠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일찍 돌아가셨다.

오빠는 가족 내에서 성품이 어땠나?

‘불의에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 내가 여고 시절 오빠가 군에 사표 내고 나온 일이 있다. 미군의 한국군 장교 차별 대우를 시정해달라고 요구했다가 미군 장교가 권총을 들이대자 가슴을 열고 쏠 테면 쏴보라고 항의하니 징계위에 회부했다더라. 오빠가 자발적으로 옷 벗고 나왔다. 아버지는 “불의에 머리 숙이지 않아서 잘했다. 너 농사지을 땅은 장만해뒀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셨다. 그 뒤 오빠가 대구와 김천에서 교사 생활하시다 다시 군에서 불러서 들어갔다.

전두환 합수부는 김재규 부장을 부정축재 사범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오빠와 부하들, 형제들까지 샅샅이 조사했지만 별문제 없었다. 아버지는 가훈을 ‘남에게 해를 주면 안 된다’로 정하고 우리 8남매에게 공직자가 월급 외에 다른 돈을 가져오면 도둑놈이라고 가르쳤다. 중정부장이 된 뒤 큰오빠가 공기업에 근무하는 남편을 불러서 “김 서방, 자네가 굶게 되면 내가 쌀 한 가마니 연탄 백 장은 대줄 수 있네. 절대 나쁜 생각, 나쁜 돈은 손댈 생각 말게”라고 강조할 정도였다.

평소 오빠가 여동생들을 많이 예뻐했다고 하더라. 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채홍사 문제로 오빠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박 전 대통령이 여자 불러 술 마시는 자리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셨다. 가족 모임 때 한번은 “오빠, 그런 소문이 있던데…”라고 슬며시 물었더니 “내가 그게 제일 고민이다. 여자 형제 다섯이나 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려니 나도 힘들다. 너희들은 모르는 척해라”고 하셨다.

10·26에 가담한 부하들이 끝까지 김재규 부장 지시를 따르겠다고 의리를 보였다.

오빠의 보통 생활 속에 나타나는 사람 대하는 모습의 결과다. 오빠는 우리 형제들과 식구들 대하듯 자상하고 인간적으로 존중해주는 말투를 중정 수위들한테도 그대로 썼다. 그런 진심으로 대했으니 부하들이 죽음 앞에서도 오빠와의 의리를 가슴에 담았을 것이다.

합수부에 강제 헌납당한 오빠 재산은 어떻게 됐나?

올케(김재규 부인 김영희씨)는 합수부에서 당한 고초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한동안 스스로 몸 추스르기도 힘들어져 올케 대신 가까이 있는 딸들이 친정어머니를 돌아가며 모셨다. 그러다 전두환이 물러난 뒤 소송을 내서 물려받은 집과 논 등은 다 되찾았다. 신군부가 끝까지 지급하지 않으려고 버티던 오빠의 군인연금도 노태우 정부 때 올케가 소송을 내서 받아냈다. 그 돈으로 고향에 내려가 시어머니를 모셨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지지층이 아직 두껍고 극성스러운데 부담은 없었나?

우리도 그 부분이 조심스럽다. 우리 유족이 뭘 하겠다고 적극 나서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국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이만큼이나마 10·26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10·26은 역사이고, 역사는 국민들의 것이다. 유족은 국민들이 역사에 궁금함을 갖고 재평가하려는 노력을 하면 가능한 한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내란죄 형사 무죄를 다투는 재심이다. 전망을 어떻게 보나?

그때 전두환이 합수부 통해서 한 일이 진짜 내란 아닌가. 자기가 대통령 자리 차지하려고 한 일인데, 예전부터 왕조시대도 살아남은 이가 내란죄를 뒤집어씌워야 속전속결이었다. 그게 소수의견 낸 6명 대법관들 의견에도 나온다. 그 대법관들은 (박정희 살해를) 내란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전두환은 오빠 재판 끝나고 그해 8월에 소수의견 낸 대법관 6명을 다 잘라버렸다. 사법부도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 제대로 들여다볼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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