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은 어떻게 생겼나 - goindol-eun eotteohge saeng-gyeossna

고인돌

선사문화유적

 청동기시대 무덤양식으로 유력자의 무덤임을 표지로 삼은 한반도 특유의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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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청동기시대 무덤양식으로 유력자의 무덤임을 표지로 삼은 한반도 특유의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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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고대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도에는 강화의 부근리·삼거리·오상리의 약 120여 기(基)의 고인돌군, 고창 상갑리·죽림리 등 고창군 전역 205군집(群集) 총 1,665기의 고인돌, 화순 효산리·대신리의 고인돌 500여 기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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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포와 입지(立地)

고인돌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에서부터 프랑스·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인도·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절강성(浙江省)·산동(山東)반도·요동(遼東)반도·길림성(吉林省)남부,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함경북도의 일부 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무덤의 구조로는 한반도의 고인돌이 가장 확실하고 수량도 가장 많다. 총 수량은 확실하지 않아 학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대략 약 15,000∼20,000여 기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한반도를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고, 넓은 평야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이 가까운 약간 높은 평지와 해안지대 등지에 많다. 하천 유역에서는 주로 하천의 유로(流路)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하였다. 그것은 당시 인간의 생활주거지가 주로 그러한 지대에서 행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인돌의 분포 상태는, 수기 또는 수 십기 어떤 경우에는 수 백기의 무리를 이루고 분포되어 있는데, 이 현상은 당시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용강석천산고인돌군[龍江石泉山支石墓群]은 용강읍 후산리 추동에 소재하며 석천산 중턱과 기슭에 약 150여 기의 고인돌이 3∼4기씩 소군(小群)을 이루어 분포되어 있는데, 탁자식(卓子式)과 기반식(碁盤式)주 01)이 함께 섞여 있다.

개천묵방리고인돌군[价川墨房里支石墓群]은 묘향산 남맥의 대동강 강변과 산기슭 낮은 구릉 상에 4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침촌리고인돌군은 황주와 사리원 간의 정방산 서쪽 구릉지대에 수 백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고 기반식이 많다. 천진동·극성동·긴동·신대동 등지의 고인돌을 1958∼1959년도 발굴조사함으로써 북한에도 기반식 고인돌형이 다수 분포함을 알수 있게 되었다.

오덕리고인돌군[五德里支石墓群]은 황해북도 연탄군 오덕산 기슭인 성매리 석장골송신동 요골평촌 등지에 수 백기의 고인돌이 골짜기마다 수 십기씩 무리를 이루어 집중 분포되어 있다. 형식은 탁자식이 주이고, 송신동고인돌군 중에는 중심에 있는 고인돌의 주위에 돌을 돌린 구역(圍石區域)이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제단(祭壇)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송신동고인돌의 특징은 고인 돌이 다른 곳의 탁자식 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

연탄두무리고인돌군은 황주천의 하천변 평지(길이 3km, 너비 300∼400m)에 10여 기씩 적은 무리를 지어 분포되어 있는데 모두 100여 기가 존재한다.

춘천 천전리(샘밭)에는 소양강 북안 모래사장에 탁자식 고인돌이 수 십기가 유로(流路)의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고, 지석의 주변은 적석층(積石層)으로 형성된 묘역을 갖추었다. 파주 덕은리 옥석부락의 고인돌은 낮은 산의 능선상에 일렬을 이루고 있고, 강화군 부근리의 고인돌군은 고려산 북쪽의 대지 상에 거대 고인돌을 중심으로 부근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수 백기의 고인돌군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4개 방향으로 열을 지어 분포되었다. 북쪽 열은 달성 쪽으로, 남쪽 열은 대봉동 수성못 쪽으로, 서쪽 열은 월배화원 쪽으로 뻗어 있어 마치 방사상(放射狀)을 이룬 듯이 분포되어 있다. 대봉동 신천변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은 중심에 상석을 두고 그 주위에 수기의 매장시설을 배치하였는데, 중심의 것은 매장시설이 없고, 주위의 것은 상석이 없는 형식으로, 중심의 상석은 묘표적 기능만 있는 이른바 묘표식 고인돌군이다. 매장시설은 석관과 석곽이 혼재되어 있고 적석층 묘역을 갖추었다.

고창 상갑리와 매산리의 고인돌군은 야산의 기슭에 대군집을 이루고 분포되어 있다. 상갑리의 경우 야산의 남사면 기슭에 약 2.5m 거리에 약 600여 기의 고인돌이 산줄기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혼재되어 있는 탁자식 고인돌은 가장 남쪽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적석층 묘역을 갖춘 고인돌도 상당수 있으며, 이 형식은 황해도의 침촌리에서 집중적으로 분포되었는데 최근에는 진안·합천·마산 등지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넓은 평야지대에 고인돌이 없는 이유는, 그곳이 대부분 습지여서 당시에는 아직 개발되기 이전으로 인간생활에 이용되기 전 단계였고, 당시 인간이 생활하기 편리한 약간 높은 대지상에 많이 축조하였기 때문이다. 대지 혹은 약간 높은 구릉지대는 양지 바른 산기슭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과 땔감 등을 구하기 편리하고, 사냥터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이러한 곳에 주거와 경작지 그리고 묘지를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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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와 형식

고인돌은 지면상에 거대한 돌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봉토(封土)로 구성된 분묘와는 달리 쉽게 눈에 들어오는 특이한 형상인데, 그 구조도 단순하여 일견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대별하면, 하나는 지상에 윗돌[上石]과 받침돌이 높이 올라와 있어 마치 탁자형(卓子形)으로 된 형상, 둘은 지면에서 낮게 4∼5개의 받침돌로 윗돌을 고여 마치 바둑판형으로 보이는 형상, 셋은 지면에 받침돌이 없이 큰 돌(윗돌)만을 지면에 바로 놓은 형상 등 3종류가 보인다. 어떤 형상이든 공통 요소는 거대한 자연 암석을 윗돌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탁자형으로 생긴 형식은 주로 한강 이북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여 북방식, 기반형으로 생긴 형식은 주로 남부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여 남방식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고인돌의 조사·연구가 확대되면서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방에서도 기반형이 다수 분포되어 있고, 반면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도 탁자형의 분포가 다수 알려지면서 북방·남방이라는 지역 표지 명칭에서 붙여진 북방식과 남방식은 비현실적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임병태는 수정한 형식 분류로 탁자식과 기반식(碁盤式)주 01)으로 대분하였고, 황기덕은 북방식을 전형(典型)고인돌, 남방식을 변형(變型)고인돌(임병태의 기반식)로 하는 견해를 제안하였다. 또 탁자식과 기반식과 달리 받침돌이 없이 지면에 윗돌만 올려놓은 형식이 의외로 많은 점을 들어 임병태는 무지석식(無支石式), 김원룡은 개석식(蓋石式)주 02)이라는 제3의 형식을 추가하였다. 그 후 북한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에서는 황기덕의 전형고인돌을 오덕형 고인돌(황해북도 연탄군 五德里)로 변형고인돌을 침촌형 고인돌(황해북도 황주군 沈村里)로 1차 분류하였다. 무지석식과 개석식이라는 제3의 형식은 엄밀히 따지면 고인돌에서 가장 표지적인 받침돌이 없는 점을 들어 손진태는 ‘고인돌’에서 제외하여 별도의 묘제로 분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상은 고인돌의 외형을 기준으로 한 1차 분류이고, 2차 분류로 들어가면 매장시설의 형식을 기준으로 하여 단석실형, 다석실형(임병태 주장)과 석실형(石室形), 석관형(石棺形), 석곽형(石槨形), 토광형(土壙形) 등으로 하자는 견해들이 있는데, 특히 후자는 다수의 연구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여기서 석실형식의 구조는 판석을 직립시켜 3면 벽을 지상에 조립하고 1면의 벽은 출입구로 개폐할 수 있게 하고, 그 위에 판상형의 두꺼운 암반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연탄 오덕리, 은율 운화리, 강화 부근리 등지의 규모가 큰 고인돌이 여기에 속한다.

또 묵방리의 고인돌 30·31·20·33호 등은 매장시설을 지상에 두었는데, 북서남벽은 얇은 판석을 포개 쌓아올려 벽을 만들고 동벽에는 아주 짧은 통로[羨道形]가 있고, 그 곳을 판석을 세워 문을 만들어 개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매장시설의 외면은 막돌과 냇돌로 돌무지무덤의 분구처럼 쌓고 그 위에 거대한 판상석을 윗돌로 올려놓았다. 여기의 석실은 마치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과 같이 장방형으로 되었고, 덮개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윗돌이 올라간다. 분구는 방형의 묘역으로 되어 있다.

석관 형식의 방식은 석실 형식과 같으나 규모가 작은 구조로 옥석리 고인돌 등이 속한다. 또 안악 노암리의 고인돌은 탁자식인데 윗돌에 받침돌이 잘 들어맞도록 윗돌 아래 면에 홈을 팠다. 이러한 예는 황해도평안도요동반도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석곽 형식은 기반식의 하부구조를 지니며 막돌로 석곽을 축조한 고인돌로 상갑리B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토광 형식은 역시 기반식의 하부구조로 돌이 없이 토광만을 파서 매장한 형식으로 순천 우산리 내우부락 10호 고인돌 등 대개 소형이 여기에 속한다.

고인돌의 규모도 천태만상이지만, 대체로 탁자식이 크고, 기반식은 소형이 많다. 그러나 기반식 중에는 상석의 높이(두께)가 월등히 높아 2m 이상 되는 것도 더러 있다.

고인돌의 크기는, 잘 알려진 고인돌 가운데 몇 기만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은율 관산리 1호 고인돌은 표고 80m 고지에 있는데, 윗돌의 크기는 장변 8.75m, 단변 4.5m, 두께 31㎝이다. 또, 노암리고인돌은 윗돌이 장변 7.78m, 단변 5.72m, 두께 70㎝이다.

강화부근리고인돌[江華富近里支石墓]은 탁자식으로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장변 6.5m, 단변 5.2m, 두께 1.2m, 지상고 2.6m의 규모이고, 받침돌은 판석을 사용하였다.

상갑리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상석이 장변 6.5m, 단변 5.3m, 두께 2m 되는 것과 용계리에서는 장변 5.5m, 단변 4.5m, 높이 5m 되는 초대형도 있으며 무게는 무려 150t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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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법과 기능

고인돌은 거대한 돌로 만들어 어마어마하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고인돌의 하부 매장주체시설은 대부분 소형으로 되어 있어 성인의 시체를 펴서 묻기[신전장(伸展葬):바로눕혀묻기(仰臥伸展葬)]에 부적합한 것들도 많다. 탁자식 고인돌에 규모가 충분한 석실과 석관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적고, 석관·석곽·토광·옹관(甕棺) 등 형식은 대부분 소형이어서 신전장을 하기에 규모가 작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시체를 굽혀서 묻기[굴신장(屈身葬)] 또는 두 차례의 장례[이차장(二次葬):육탈(肉脫) 후 취골(取骨), 화장 후 골회장(骨灰藏)]을 추정케 한다. 실제로 신전장한 예는 드물다. 제천 황석리 충13호·충6호·충7호(‘충’은 충북대학교의 약자)에서 신전장한 예가 발견되었는데, 13호에서는 거의 완전한 인골이 발견되었다. 굴신장의 예는 대구 진천동에서 확인되었다. 3호 B관에 인골 신장 1.5∼1.6m, 20세 가량의 여인의 골과 치아 2개를 길이 1.1m 규모의 석관 안에 매장하였다. 굴신의 상태는 하지골(下肢骨)을 뒤로 굽혀서 대퇴골(大腿骨)과 겹치게 하였다.

석관을 옆으로 연결한 복식(複式)석관의 예는 강계 공귀리의 석관묘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고, 또 창원곡안리1호고인돌[昌原谷安里一號支石墓]은 막돌로 축조한 석곽인데 중간에 판석을 수립하여 2개의 매장공간을 만들었다. 진천동3호, 곡안리1호 등은 합장(合葬)의 굴신장으로 볼 수 있다.

오덕리 석장골 제2지점의 송신동고인돌군은 한반도 최대급 고인돌군인데, 22호는 길이 1.6m의 석실 내부의 중간에 판석으로 칸막이하여 폭이 각각 40㎝, 37㎝, 83㎝ 되는 3개의 소형 석실을 마련하였다. 31호 고인돌의 2.2×1.4m 되는 석관은 폭이 50∼60㎝ 되게끔 4개의 소형관을 만들었고, 이들 분할된 소형 석관은 굴신장 하기에도 작아 보인다. 이 경우는 취골 후 이차장을 한 합장 형식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고인돌 장법의 주류는 신전장이 아니라 굴신장 또는 이차장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는 고인돌의 무덤으로서의 기능만을 들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고인돌의 분포지가 거의 범세계적인 것임과 아울러서 그 기능에 관해서도 많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무덤 기능, 둘째는 제단(祭壇)의 기능, 셋째는 묘표석(墓標石)의 기능 등인데, 묘표석의 기능은 제단의 기능에 포함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곳은 무덤구역이다”라는 인식은 축조 당시에는 별로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학문적 목적에 의한 분류로 생각된다. 그것보다는 소집단 혈연관계에서 공용(公用) 목적으로 세운 제단으로 해석함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의 무덤과 제단 기능에 관한 견해는 이영문에 의하면, 1910년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지신(地神)에 대한 제사용으로 해석하고 있어 무덤과의 관련은 멀다고 하였다. 다음 손진태와 타이완의 능순성(凌純聲) 등이 무덤에 대한 제단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후에 많은 국내외 연구자들이 이 견해를 수용하였다.

고인돌의 축조는 석재가 거대하고 무게가 많이 나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조직체가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세력집단을 전제로 하고, 그것은 고대국가 성립 이전의 소국(小國)주 03) 상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남해안 지방 고인돌에서 다수의 비파형청동단검(琵琶形靑銅短劍)이 출토되는 단계는 이미 고대국가 성립 이후라고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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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묻거리

고인돌의 껴묻거리[副葬品]는 다른 묘제에 비해 극히 빈약한 편이다. 많은 경우에 마제석기(磨製石器) 몇 개와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 약간 그리고 간혹 홍도(紅陶)가 발견된다. 마제석기에는 석검(石劍)·석촉(石鏃)이 가장 많고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와 석부(石斧)는 그 수량이 많지 않다. 무문토기는 주로 매장주체시설 밖에서 파편 상태로 발견되는데, 의례 후 일부러 깨서 묻은 것으로 추측한다. 홍도는 전체적으로 보면 수량이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같은 시대의 석곽묘(石槨墓)나 석관묘(石棺墓)에 비해 많은 편이다. 홍도는 주거지에서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실생활 용기로 보기보다는 매장의례용 토기로 추측하고 있다.

청동기 등 금속제 껴묻거리의 출토는 극히 희소하다. 출토지역으로 보면 대부분 한반도의 남부 지방 그것도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되었고, 예외적으로 한강 유역인 양평 상자포리에 1사례가 있을 뿐이다. 형식별로 보면, 탁자식 고인돌에서는 청동기가 출토된 일이 거의 없고, 대부분 기반식 고인돌에서 출토되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양평상자포리1호고인돌[楊平上紫浦里一號支石墓] 토광에서는 석기 없이 세형동검(細形銅劍) 1개만이 출토되었다. 세형동검이라는 품종도 드문 예에 속한다. 전라남도 남해안 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의 예를 들어보면, 고흥운대리고인돌[高興雲袋里支石墓] 석관에서는 마제석기와 함께 비파형동검의 하부 파편이 출토된 일이 있고, 최근에는 마산 진동리, 순천 우산리 내우부락, 보성 덕치리, 여수의 오림동과 봉계동 및 평여동 나군 2호 등지의 고인돌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특히 여수 적량동 상적의 고인돌군에서는 비파형동검 7개와 동모(銅矛) 1개 등 8개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의 고인돌군은 대부분 석곽과 석관의 형식이고, 그것도 연대가 올라가는 비파형동검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껴묻거리가 1개도 들어가지 않은 무부장품(無副葬品) 고인돌도 상당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이들 청동기가 출토되는 고인돌은 고인돌 중에서 연대가 내려가는 것들로서 이미 고대국가가 성립된 후에 조성된 고인돌이고, 성격상 당시 지역 수장(首長)의 무덤일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즉 대동강 유역에서 고조선(古朝鮮)이 건국된 후의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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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와 기원문제

고인돌의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① 파주 옥석리와 제원 황석리의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을 방사성탄소측정(放射性炭素測定)으로 얻은 연대를 활용하여 탁자식의 경우 B.C. 8세기, 기반식의 경우 B.C. 7세기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김제원·윤무병). ② B.C. 2,000년 후반기까지 올려보는 북한학계의 견해가 있다(『조선고고학개요』). ③ 청동기가 많이 출토된 전라남도 지방 고인돌의 연대를 B.C. 8∼7세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영문). ④ 일본학계에서는 연대를 많이 내려 보는데, 침촌리고인돌은 B.C. 5∼4세기, 황석리는 B.C. 3세기, 대봉동고인돌은 B.C. 3∼2세기로 각각 추정하였다(甲元眞之). 이러한 제견해가 제시 되었는데, 이것들은 상한연대(上限年代)이고, 하한연대(下限年代)는 B.C. 3세기, B.C. 2세기, B.C. 1세기 등이 있다. 예외적인 견해로 신석기시대 중기까지 올려 보려는 견해도 있다(박희현).

고인돌이라는 무덤은 어디서 왔을까? 즉, 고인돌의 기원에 관한 견해는 2∼3의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첫째는 한반도 자생설(自生說)로서 석관묘가 지상화(地上化)하여 고인돌이 되었다고 보는 학설이다(김원룡). 이 설은 거대한 상석이 석관묘와 결합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둘째는 요녕(遼寧) 지방의 대석개묘(大石蓋墓)·석개석관묘(石蓋石棺墓)·석개석곽묘(石蓋石槨墓)·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 등이 제단지석묘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는 학설이다(이영문). 이 설은 요녕 지방의 석개묘들이 지상화하는 과정과, 그것들의 연대가 한반도의 고인돌보다 선행한다는 전제조건이 증명되어야 한다. 결국 앞의 두 설을 합하여 정리하면, 석관묘의 개석이 지상화 하면서 제단의 기능이 결부되어 거대한 암석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불안한 요소가 있다. 즉 그것은 유럽, 동남아, 중국 동해안 지방의 고인돌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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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세계 거석문화와 고인돌  (재단법인 동북아지석묘연구소, 2004)

  • 한국지석묘사회연구  (이영문, 학연문화사, 2002)

  • 『한반도의 고분』(강인구,『아르케 대우학술총서논저』465,2000)

  •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  (강인구, 학연문화사, 1997)

  • 한국 고대의 고고와 역사  (강인구, 학연문화사, 1997)

  • 전남지방지석묘사회의 연구  (이영문, 한국교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조선고고학개요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7)

  • 한국지석묘연구  (김재원·윤무병, 국립박물관, 1967)

  • 「한국지석묘의 형식 및 연대문제」(임병태,『사총』9,1964)

  • 「조선돌멘에 관한 조사연구」(손진태,『조선민속문화연구』,1948)

  • 『朝鮮磨製石劍の硏究』(有光敎一,『有光敎一著作集』第一卷,1990)

  • 「朝鮮支石墓の編年」(甲元眞之,『朝鮮學報』第66輯,朝鮮學會,1973)

  • 滿鮮原始墳墓の硏究  (三上次男, 吉川弘文館, 1961)

  • 「中國石棚之硏究」(鳥居龍藏,『燕京學報』第31期,北平燕京大學 出版,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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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1바둑판식주02탁자형의 퇴화형식이라는 의미 주03현재의 郡 정도의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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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청동기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모두 가리키는 역사용어.
  • 거석기념물석기시대 인류가 큰 돌을 이용하여 만든 축조물.
  • 무덤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 묘·분묘.
  • 고분사람의 시신을 매장한 시설물을 지칭하는 용어.
  • 돌무덤돌을 이용하여 쌓아올린 무덤양식.
  • 신분법적 지위나 사회적 통념에 따른 개인의 지위나 자격을 가리키는 사회학용어.
  • 부장품무덤 안에 시체를 안치할 때 함께 넣어 매장하는 물품.
  • 청동기시대인류가 청동기라는 금속재료를 주로 사용하며 문명을 꽃피운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