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씨 유래 - hangug seongssi yul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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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유래

성씨 유래biokr2021-08-24T11:55:55+00:00

성씨 유래

제목한국 성씨의 발자취2021-08-30 00:36
작성자biokr
한국 성씨 유래 - hangug seongssi yulae

우리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로 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화 되어 분관·분파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 [삼국시대]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 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대 씨족사회에는 성 이라는 것이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 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이다.

1.고구려
고구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 씨(高氏)의 성을 썼다. 그밖에 고구려에서는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 (于) 주(周) 마(馬) 손(孫) 창(倉) 동(董) 예(芮) 연(淵) 명림 (明臨) 을지 (乙支) 등 10여종 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백제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 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다. 그밖에 사(沙) 연(燕) 협() 해(解) 진(眞) 국(國) 목 (木) 백() 의 8대성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고이(古爾) 흑치(黑齒) 등 10여종의 성이 사용되었다.

3.신라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金)이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종 성인 김씨·박씨는 7세기 초부터 《구당서》· 《신당서》에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이며, 국인에는 김· 박 양성이 많고, 이성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 다.라고 하였다.

한편, 6성(이·최·정·손·배·설)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 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밖에 장(張) 요(姚) 등의 성 도 보인다

▶ [통일신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삼국의 성씨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계 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 주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삼국통일 후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 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 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 또는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글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이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 하여 보낸 외교문서와는 차이가 생겨났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 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 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 신씨(申氏) 정씨(貞氏) 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 [고려시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인 호족은 사성· 모성· 자 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 작업과 함께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을 분정(分定)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 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 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성씨록의 편 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 리지 소재 성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沈· 河· 玉· 明· 俊· 昔· 諸· 益· 森· 邦· 芳· 價· 勝· 濯· 承氏)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 는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디 신라에서 출 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漢姓化) 과정에 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 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 [조선시대]

고려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 파 등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화척(禾 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 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 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이 그만큼 많았 다. 그렇게 많았던 천민층이 16세기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 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 성을 가지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된 것 은 성의 대중화를 촉진시켰으며,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 행되면서부터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가지게끔 법제화되었다. 무성인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 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례 1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서기나 경찰이 마 음대로 성을 지어주었다.
사례 2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랐다.
사례 3
김·이·박씨가 많은 데서 그러한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 다. 이 때문에 종전의 대성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 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을 삼은 경우가 많았다.
사례 4.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할 때나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 [일제시대]

국민 모두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시기는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에 와서 단행된 것이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과 정에서 시행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우리의 성씨사 상 최대의 수난기는 무엇보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 氏改名)이라 하겠다.

일제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일환에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했던 창씨개명은, 성이란 일생토록 절 대로 바꿀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한 우리 민족에게는 그대로 받 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지 못할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때 각 씨족 문중에서는 회의를 열어 창씨를 하면서도 우리 민 족은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무척 애 를 썼다.

사례 1
이가(李家), 김본(金本), 배정(裵井), 오산(吳山), 장전(張田) 하는 식으로 본성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였다.
사례 2
남양(南陽) 수원(水原) 경산(京山) 광산(光山) 하는 식으로 본관 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사례 3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예 컨대, 파평윤씨의 경우 평소(平沼)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 李穡)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이라 하였고, 청주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이러한 일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 서양자(庶養子) 제도 와 함께 1939년말부터 실시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이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자 창씨개명한 호적부 기재와 이에 배치되는 모든 법령·훈령 및 통첩은 그 창초일부터 무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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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은 몇개?

이 중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성씨는 1,507개이고, 한자가 없는 성씨는 4,075개로 조사되었다. 한국의 성씨는 본관에 따라 구분된다. 본관별 성씨는 2000년 4,179개에서 2015년 36,744개로 증가했다.

한국에서는 이름을 어떻게 불러요?

넷째, 한국 이름은 성(姓)과 명(名), 이렇게 두 단위로 이루어지며 성 다음에 명이 오는 순서이다. 한국에서는 '김형남'하면, '김'은 성이고, '형남'은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