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독일어: Gott ist tot, 영어: God is dead, The Death of God)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로서, 허무주의를 나타내는 말로 넓게 인용되는 말이다. Show 의미[편집]신을 포함해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일체의 절대적 가치가 그 본질적 의미를 잃고 허무해짐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최고가치의 상실로 인한 허무주의의 도래를 뜻하는 말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최고 가치의 상실로 이해하고 이로 인해 유럽에 허무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경고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 즉, 비극적 상황 앞에서도 자긍심을 잃지 않는 고귀한 정신이 필요함을 설한다. 이러한 정신을 지상에서 실현한 자가 위버멘쉬이다. 니체의 저작[편집]《즐거운 지식》(Die frohlich Wissenschaft, 1882)의 108장, 125장, 343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안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125장의 기술인데, 해당 부분을 발췌하면 Gott ist tott. Gott bleibt todt.Und wir haben ihn getodtet.Wie trosten wir uns, die Morder aller Morder?한국어로는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이라 한다. 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년)의 모든 부분은, 함축적 언어[1]로 씌인 《즐거운 지식》(1882년)의 사상을 이은 것이다. 원문[편집]신의 죽음과 그에따른 상실감은 《즐거운 학문》에 최초로 기술된다.
신의 죽음의 신학[편집]니체의 말인 「신은 죽었다」는 1960년대가 되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이 번성한 시대의 미국의 신학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미국의 신학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신은 인간에게 리얼한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로, 신은 죽었다는 의미로 이용한다. 1957년에 미국의 신학자 게이브릴 바하니안은 「신은 죽었다」라고 제목을 붙인 저서를 저술했다. 바니한은 그 중에서, 무신론을 미국의 대중의 삶의 방법이라 말하고 있다. 미국인의 신학자 토마스 알타이더는 에모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 「신은 죽었어?」를 출판한다. 알타더는 무신론적 신학자가 아니고, 「이 역사 안에 신이 완전히 내재화하고 있다.」라고 신의 내재화를 말한 것이다[3]. 또 미국의 신학자 윌리엄 해밀튼이 다른 입장으로부터, 1961년에 저서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본질」로, 다른 시점의 신의 죽음의 신학을 전개했다.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관련항목[편집]
1. 원전[편집]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명언이자 두고두고 써먹히는 떡밥. 다만 니체의 말로 유명해졌을 뿐 Gott ist tot라는 명제를 니체가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그의 저서인 《즐거운 학문》에서다. 한 미치광이의 말이다, 원문을 보자: [1]
여기서 신을 죽였다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 가치가 부재하게 된 상황을 가리킨다. 신은 죽었다는 표현을 주요하게 언급하는 니체 이전의 사상가로는 헤겔이 있다. 헤겔은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정명제로 '신은 죽었다'를 제시하는데, 그 까닭은 칸트의 비판철학이 신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함으로써, 그리고 근대에 대두된 유명론이 신을 단지 이름 뿐인 것으로 규정해 버림으로써 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신은 죽었다가 되살아난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그에 따르면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것이 신의 본질이며, 그리고 인간 속에서 인간이 신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신이고, 마침내 차이를 극복하고 절대적 단계에 이른 정신은 소생의 과정을 거쳐 부활한 신인 것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는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신과 같아질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면모는 유사하다 하겠다. 이후로도 신은 죽었다는 명제가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들에서 발견되고는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니체의 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경우 이 명제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주의, 즉 절대적 관념에 대한 부정이 되며 헤겔적이라기보다는 니체적이다. 2. 의미[편집]간단하게 말하자면 '추구해야할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는 [2] 허무주의적 말이다. 우선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가 정의한 '확신자'와 ' 초인(Übermensch)'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니체가 정의한 '확신자'는 궁극적인 최후의 진리를 잡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궁극적 진리를 알았다고 생각함으로써 더이상 변화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안주하려 한다. 또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다른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 막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니체는 이들이 이러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그들이 진정으로 참된 것을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고, 그러기에 인간의 '확신'이 '의심'보다 위험스럽고 독단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비해 '초인'은 어떤 주의(ism)에 안착하지 않고 항상 움직이며 나아가는 자이고 몰락하는 자이며, 그렇게 몰락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상승하는 자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이 신앙이 가진 모순들과 불일치함등에 꾸준히 의심하며 질문을 던져가며 끝내 더 나은 신앙을 만들거나 또는 그 신앙을 몰락하게 하여 더 나은 사상체계를 발전시킨다면 이는 '초인' 이고, 해당 신앙에서 발견된 모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앙무오설등을 설파하며 매일 12시간 이상 기도를 올려야 하는 교리등을 따르며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들은 '확신자' 이며 '노예'인 것이다. 이러한 '초인'들은 자기가 따르던 이념이나 주의가 지닌 논리의 제한성, 혹은 그 한계을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이행하는 자이고, 그러므로 모든 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참언으로 초인, 위버멘슈(Übermensch, 영어로는 Over + human)는 무지막지한 능력을 가진 ' 슈퍼맨'이 아니라, 이 진실되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3]자신의 모든 것을 극복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가장 완벽한 '극복한 자'이다. [4]힘에의 의지 또한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순수한 '힘으로서의 의지' 그 자체이지만, 과거 오역으로 인하여 권력으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5]이에 니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항상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진리, 혹은 절대자가 없는 세계란 어떤 것에도 고정되거나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극복의 과정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인간은 이러한 운명을 고대 신앙이 그러했듯 두려워 하며 '신의 분노'라며 포장하거나, 혹은 '이런 끝없는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숙명이 바로 인간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일부분이자 자기 것으로 인식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비유하자면 신의 사망 이후 '초인'으로 사는 것을 인간의 숙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보편적인 절대 불변의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전 포고이며, '초인'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3. 해석[편집]
박사의 해설 인트로 음악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니체의 사상은 초인(超人)에 의한 힘에의 의지의 추구이며, 초인이란 범속한 일반인이 아니라 위험을 겁내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의 힘을 발휘, 구사하는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 19세기를 비롯한 이전의 유럽은 기독교 정신이 지배하는 세계였으며, 인간이 신에 귀의하여 신의 의지(이성적 진리의 세계)에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도덕적 세계였는데,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권력의지와는 대립된 가치 체계이다. 니체는 세기의 반항아처럼 기독교의 도덕적 세계관에 반항하면서 그와는 대립되는 새로운 윤리, 즉 천상(天上)의 신이라는 타율에서 벗어나, 고독하지만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기초로, 자기가 스스로 지상적(地上的) 선악의 기준을 세우려는 초인의 윤리를 부르짖은 것이며, 새로운 윤리에 의해 기왕의 형이상학적 개념 구도를 타파, 초월하는 새로운 신(새로운 가치 창조자)이 되고자 하는 것이 니체의 목적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적인 낡은 신은 이미 죽고 새로운 초인적 가치의 신이 강보에 싸인 채 요람에 누워있다고 외친 것이며, '신이 죽었다'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유럽의 형이상학적 가치체계의 종말을 선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며, 기독교적 사고방식은 암암리에 우리의 현실과 삶을 경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미신적 사고체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매우 극단적인 표현으로 주장한 것.
4. 관련 사례[편집]과거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 살인 사건 중에는 아들이 재수하게 되자 대졸 고학력의 어머니가 이 말을 인용해 거실에다 크게 '내 아들은 죽었다'라고 써서 붙여놓기도 했다. 친척들이 너무 심하지 않냐고 하자 '오기를 돋궈주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때 아들의 가슴 속에서 어머니도 죽었는데 그로부터 2개월 뒤 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8] 5. 각종 매체에서[편집]인용되는 빈도는 카를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와 쌍벽을 이룬다. 대개 이 문장을 이용하여 종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때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혀 상관 없는 문맥에 저 말 하나 인용해놓고 자신의 모든 근거 없는 주장을 정당화하려 하면 곤란하다.
[1] 차라투스트라이다.
[2] 플라톤의 이데아, 종교의 신, 정의, 자본가들의 자본, 과학, 이성 등등등.[3] 니체는 천국과 지옥,
이데아를 변화하지 않는 거짓 세계라고 두고 두고 말했다.[4] 원광대학교 철학과의 김정현 교수는 Ubermensch를 '초인'이 아니라
'극복인'으로 번역한다.[5] 이 '위버멘슈'는 아돌프 히틀러도 그
개념을 오해하여 오용, 악용했다. 그런데 그 근본 원인은 천하의 개쌍년인 니체의 여동생이었다. 니체를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일생동안 속였다. 위버멘쉬를 권력의지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한 것도 그녀의 만행.[6]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 최혁순 역에서
인용.[7] 심지어 철학자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8] 사실 이런 방법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야 오기를 돋궈주기 위함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이 정도 되면 혼선이 올 수 있다. 그러다보면 '내가 재수했다고 진짜
죽이려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비뚤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잊지 말자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 의미를 못 알아냈다고 질책하는 건 무의미하다.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질책한다면 말이 되지만.[9] 그 예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교수가 실은 어릴 적, 기독교
신자였다가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입은, 사실상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이상의 반신론자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무신론자이면서 반신론자일 수도 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