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결말 - peiteu seutei naiteu gyeolmal

FATE/STAY NIGHT (페이트/스테이 나이트)

5개의 엔딩과 40개의 배드 엔딩을 모두 봤다. 약 70시간 정도 걸린 듯.

대작이다.

나를 두 번이나 울려버린 감동적 스토리.

각 루트마다 적절히 드러나게 안배된 정교한 세계관

논리적이고 치밀한 세부 설정

몰입을 극대화하는 연출력: 사운드트랙, 스틸컷, 텍스트 전개

존재를 흔드는 울림이 있는, 메시지

이것은 게임이다. 어쩌면 소설에 가깝다.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 자체가 텍스트를 읽고 선택지를 고르는 행동밖에 요구하지 않기에, 하이퍼 텍스트 소설이라 할 수 있겠지. 그래도 게임이다. 몰입과 정서적 동일시의 정도를 고려하면 그러하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스토리의 진행이 크게 세 개의 루트로 나뉜다. 각 루트의 히로인 이름에 따라 '세이버 루트', '린 루트', '사쿠라 루트'로 불린다. 세 개의 루트는 동일한 설정에서 동일한 등장인물들에 의해 진행되지만, 초기 조건의 미묘한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 루트의 이야기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씩 살펴보자.

1. FATE

통칭 '세이버 루트', <FATE>는 실패한 이타적 이상(정의의 사자가 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이상)에 대한 회한과 미망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한다. 기사왕으로서 자신의 국민들을 평화와 안녕으로 이끌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왕국의 파멸을 지켜보며 죽음을 맞아야 했던 세이버의 회한이, 기사왕으로서의 자신의 소멸을 전제하는 과거의 재구축에 대한 소망이라는 '적극적 자기부정'으로 이어지는 반면, 대재앙의 한가운데서 타인을 외면하며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시로의 죄의식은,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구원한다는 이상의 추구를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소극적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FATE>에서, 주인공 시로와 그의 서번트 세이버는 서로의 거울상이다.

하악하악...세이버짱 ㅠ.ㅠ

이들은 감내할 수 없는 과거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억압하며 자신을 '부정'했지만 종국에는 '자기부정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화해한다. 지나간 것을 바꿀 순 없다. 세이버가 성배를 얻어 과거로 돌아가 자신 외의 다른 이가 왕국의 왕이 되게 한다는 소원을 이룬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세이버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싸우며 겪었던 고통과 환희,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 그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와 맞섰던 수많은 사람들을 無로 돌림을 의미한다. 그럴 수는 없다. 애초에 그런 초월적인 행위가 용납될 수 있을 리 없다.

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불순한(?) 자기억압으로부터 비롯된 이상이지만,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희생하겠다'는 그 이상은 이미 그것의 발생적 근원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 이상으로 인해 시로는 살아갈 수 있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아주 간결하게 요약한다면, 이것이 이 루트의 메시지다. "FATE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FATE를 열어갈 수 있다. 이 때, 과거의 운명과 미래의 운명의 매개가 되는 것은 꿈(이상)이다."

하지만 세이버의 경우에 사정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은 무한히 유예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딩의 제목은 <꿈의 계속>이 된다. 세이버는 새로운 현실을 열어갈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계속된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미래의 수많은 독자들 속에 그녀가 살아있다면, 그녀의 속에도 무한한 독자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꿈은 전승되고 이해되고 실현되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영원한 꿈

2. Unlimited Blade Works

통칭 린 루트. 세이버 루트가 과거의 실패한 이상에 대한 회한을 축으로 했다면 린 루트는 실패가 예견되는 이타적 이상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주인공 시로에게 맞서는 아처는 그러한 절망이 육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 문제의식은 세이버 루트의 확장 버전이다.

<unlimited blade works 무한의 검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무한의 검제 발동 주문을 살펴보자.

우선 아처 버전

I am the bone of my sword.

나는 검의 골자.

Steel is my body, and fire is my blood.

강철은 나의 몸, 불꽃은 나의 피

I have created over a thousand blades.

무수한 검을 만들어왔다.

Unknown to Death,

죽음은 나를 막을 수 없고,

Nor known to Life.

삶 또한 그러하다.

Have withstood pain to create many weapons.

오직 수많은 무기를 만드는 고통을 견디나니

Yet, those hands will never hold anything.

두 손에 쥐는 것은 공허 뿐.

So as I pray, "Ulimited Blade Works"

그리하여 나는 소망한다, "무한의 검제"를

시로 버전

I am the bone of my sword.

나는 검의 골자

Steel is my body, and fire is my blood.

강철은 나의 몸, 불꽃은 나의 피

I have created over a thousand blades.

무수한 검을 만들어왔다.

Unaware of loss,

잃는 것 따위,

Nor aware of gain.

얻는 것 따위, 생각하랴.

Withstood pain to create many weapons waiting for one's arrival.

단지 '그'만을 기다리며 수많은 무기를 만드는 고통을 견딜 뿐

I have no regrets. This is the only path.

그렇다면 후회는 없다. 이것이 유일한 길.

My whole life was "Unlimited Blade Works"

내 인생은 "무한의 검제"였다.

주문이 미묘하게 다르다. 결과적으로 시로와 아처는 둘 다 무한한 검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는 '그'의 재림, 도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이것은 곧 실패가 확정된 이상에 대한 믿음. 어떻게 실패가 확정된 꿈을 믿을 수 있는가?

우선 검제(劍製 blade works)가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창조다. 하지만 원본(이데아)에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한 창조다. 검의 본질은 살인도구.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도구이기도 하다. 따라서 검제란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불완전한 시도, 더군다나 폭력적인 시도. 끝나지 않는 투쟁.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뼈를 깎아 불완전한 검을 만들고 그것이 세상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 그러고도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검을 만들어 내는 처절한 시도.

으아아아아아 ㅅㅂㄹㅁ

따라서 영창 내용이 차이나는 이유는 명백하다. 아처는 이미 이상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Yet, those hands will never hold anything.

So as I pray, "Ulimited Blade Works"

그저 창조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삶에 의미란 없음을 받아들이고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고 오직 "무한의 검제"만을 '소망'하게 된 것이다.

반면 시로는,

I have no regrets. This is the only path.

My whole life was "Unlimited Blade Works"

후회는 없다. 이미 '무한의 검제'가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과거형이다) 유일한 길은 필연적인 길이 된다. 그는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waiting for one's arrival.)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 무한한 시도를 반복한다.(Withstood pain to create many weapons...)

요컨대 아처에게 있어 무한의 검제는 그 자체가 목적인 반면, 시로에게 무한의 검제는 수단일 뿐이다. 아처가 현명한(깨달은) 패배주의자라면 시로는 반항적인(철없는) 부조리의 영웅.

3. Heavens Feel

이제 대단원. 드디어 사쿠라 루트다. 앞의 두 루트가 질문이었다면 이번 루트는 그에 대한 잠정적 대답과도 같지. 결론은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없는 이상은 공허하다는 것. 부정의 부정은 무한한 긍정이라는(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도 잔인한 비극적 스토리를 만들어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실존적 영웅 시로를 고통스런 장애물들 속에 내던지는 것도 모자라 이런 최악의 딜레마 상황으로 밀어넣다니 말이다. 사쿠라에 투영된 자기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부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상을 선택하면 자기자신을 부정해야 하고, 그렇다고 이상을 포기하면 역시 자기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이 모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혼란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

아처조차도 이상의 씨앗 즉 사랑의 잔재를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다. 그의 주력 무기가 왜 하필 "간장, 막야"겠는가? 무한한 검제가 가능한 서번트라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뽑아써도 될 법한데 말야, 왜 보구로서는 C- 랭크밖에 안 되는 간장, 막야 쌍검을 쓰겠나?

간장, 막야검은 부부검이다

또한 그가 왜 토오사카의 팬던트를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었겠는가?

이 루트는 얼핏 그저그런 멜로물로 읽힐 수 있지만, 실은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고통스런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질문은,

"실패의 증거로서 품게 된 이상, 더군다나 앞으로도 영원히 실패한다는 필연성을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가?"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그렇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린다."

덧.

이 게임에는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간지나는 전투 장면도 많고, 므흣한 씬도 좀 있다.

조연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역시,

무한한 자본력을 자랑하며 말도 안 되는 보구를 시전하던 삐까번쩍 새끼.

궁극 필살기, 왕의 재보(Gate of Babylon)

가장 안타까웠던 조연은,

팜므파탈, 캐스터 누님.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여주인공은 당연히,

토오사카 린.

"까불면 뒤진다."

밥이나 먹자

역시 나는 '썅년' 취향인가. ㅠ.ㅠ

아 배고프다. 점심이나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