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돔과 고모라 - yeonghwa sodomgwa gomola

전 세계 사람들 중,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자그마치 31%라고 하는데요. 하느님을 믿는 종교의 종류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독교와 천주교죠. 오늘은 소돔과 고모라 줄거리를 알려드릴 텐데요. 성경을 자주 접하셨던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소돔과 고모라 - yeonghwa sodomgwa gomola

성경에 창세기 18 에 관련하여 소돔과 고모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내용을 알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 생소한 단어라고 느낄 수 있는데요. 이 이야기는 실제 1962년에 이탈리아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종교를 생각하는 마음을 떠나 한 번쯤 보면 좋을 듯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소돔과고모라 줄거리인데요. (Lot)이 히브리인들을 이끌고서 사막을 지났고, 기름진 약속의 땅을 찾아가게 됩니다. 유랑생활을 오래한 그들은 한 마을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밭을 경작하여 살며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살던 곳에 헬라민족이라는 사막 부족이 침입하게 되는데요. 롯과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는 집을 불태우며 소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주인공은 소돔성의 여왕과 손을 잡고서 유황 + 불을 이용해 그들을 물리치는데요. 물리치는 것은 둘째치고 유황과 불로 인해 애써 가꾼 땅이 황무지로 변하게 되어 다시 한 번 살 곳을 찾아 소돔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롯의 여왕은 감옥에 갇혀 최후의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공은 성을 떠나라고 하며 감옥 문이 열리는데요. 이 때 사람들에게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그 열 명이 없어 결국 성은 불과 유황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후에 심판의 장면을 절대 쳐다보지 말라고 하는 명령에 인물들은 그 곳을 빠져 나오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창세기 18 의 내용을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 보면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소돔과고모라 줄거리인데요. 영화를 찾아 실제 시각적인 영상으로 보시면 그렇게 이해하기에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 시대를 대표했던 명배우들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에 비해, 조연 연기자들의 연기가 어색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또한 과한 이태리 억양으로 인해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말들이 많았는데요. 사실 이것을 그렇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종교인들이 한 번쯤 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보니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품이 1962년 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영화는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진 후 오직 롯과 그를 따르는 히브리인과의 이야기로만 진행된다.

 성경과 달리 아브라함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러 이야기의 개연성으로는 알드리치 감독의 이 작품이 더 쉽게 납득이 된다.

 소돔인과 7년간 지대를 바치는 조건으로 땅을 갖게된 롯 족속은 성전을 만들고 땜을 쌓아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려고 한다.

 누나인 여왕의 권좌를 차지하고자 하는 동생과 소돔의 소금을 탐내는 헬라족이 결탁하여 침략을 하고 이를 롯이 준비한 계책으로 막아낸다.

 불의 장막과 댐을 터트려 적을 수장시키는 전투장면은 결코 스케일이 작지 않다.

 댐이 터지면서 롯이 빌린 땅에서 소금맥이 발견되고, 롯족은 소금을 팔아 부를 축척하고 타락해간다. 롯족은 전쟁후 소돔시로 이주한다.

 롯의 두 딸이 여왕의 동생에게 유혹당하는 과정도 이후 롯과 그 딸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 전개가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롯이 여왕이 보낸 노예출신 여인 엘디스와 결혼하고, 그녀는 성경에서 처럼 소금기둥으로 변하게 된다.

 성경의 모순까지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는 점만 빼고는 감독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숨은 걸작이다.

감독 : 로버트 알드리치

출연 : 아누크 에메, 피어 안젤리, 스탠리 베이커, 스튜어트 그레인저, 릭 바타글리아

평점 : ★★★★

영화 소돔과 고모라 - yeonghwa sodomgwa gom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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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보

《소돔과 고모라》는 1962년 10월에 개봉한 이탈리아의 모험, 드라마, 역사, 기독교, 종교 영화이다. 로버트 앨드리치가 감독을, 휴고 버틀러와 조지오 프로스페리가 각본을 맡았다. 이탈리아에서는 1962년 10월 4일에, 영국에서는 1962년 11월 29일에, 프랑스에서는 1962년 11월 21일에, 미국에서는 1963년 1월 23일에 개봉되었다.

롯의 소돔기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다고 창세기 19장은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거대한 도성이 불타며 무너져 내리고 백성들이 공포에 날뛰는 순간에 멸망의 현장을 빠져나가던 유일한 가족 중 한 여인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다. 테크놀로지와 스펙터클의 전시에 집착했던 전성기 할리우드가 이 광경을 놓쳤을 리 없다. 홍해가 갈라지는 순간이나 치열한 전투 씬 이상으로 장엄한 이 이야기에는 게다가 선명한 인과관계와 메시지까지 있다. 타락한 도시는 멸망하고 신의 경고를 무시하면 죽는다.

문제는 주인공 롯이었을 것이다. 롯이 어떤 인물인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고향을 떠날 때 과감히 삼촌을 따라나서기는 했으나, 아브라함이 네가 이쪽을 택하면 나는 저쪽으로 가겠다고 하자 냉큼 요단강변 비옥한 땅을 택해서 자리를 잡았던 그였다. 타락한 도시 소돔땅에 살면서 엘람왕 그돌라오멜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에 의해 구출되었고,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보호한답시고 소돔인들에게 손님들 대신 자신의 두 딸을 범하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소돔의 멸망과 함께 아내를 잃고 나서 정착한 소알에서는 자신의 딸들과 동침하여 이방민족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된다. 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강렬한 서사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성경의 롯은 어딘지 비굴하고 이기적인데다가 심지어 선민의 계보에서조차 벗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버트 알드리치의 1962년 영화 <소돔과 고모라>는 하지만 구원자아브라함 대신 고통의 당사자인 롯을 기어이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 그에게 당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노아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믿음의 조상이 된 히브리 족장 아브라함의 모습을 모두 입혀 놓았다. 그리하여, 의인 열 명도 없는 소돔에서 간신히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나왔고, 그 와중에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는 것을 보아야했던 비참하고 무력한 가장 롯(스튜어트 그랜저 분)은 이 영화에서 히브리민족 전체와 소돔의 노예들까지 모두 구해내는, 출애굽의 모세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러려면, ‘의인 열 명소돔사람 중 의인 열 명을 찾는 것으로 바뀌어야 했다. 소돔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아닌 롯의 역할로 주어졌고, 엘람왕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도 롯이며, 아브라함은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영화는 또한 롯의 작은 딸 마랍의 사윗감에게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의 이름을 붙였는데, 여기서 이스마엘은 롯보다 더 의롭고 강직하다. 아브라함과 이삭 대신 영화 <소돔과 고모라>는 축복의 서사에서 밀려난 롯과 이스마엘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온 것이다. 이처럼 심각하게 왜곡된(또는 재구성된)’ 성경 영화에서 과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물론이다.

롯은 왜 소돔땅에 들어갔나

흥미롭게도 1962년의 할리우드는 소돔을 멸망에 이르게 한 죄악을 동성애나 성적 타락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소돔의 여왕 베라(아누크 에이미 분)가 여성 노예들과 동성애 관계를 보이고 연일 그가 벌이는 유흥과 여왕의 남동생 아스다롯(스탠리 베이커 분)의 성적인 타락이 소돔의 단면을 이루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롯과 이스마엘을 비롯한 히브리 백성들이 지목한 이 도시의 가장 악한 죄는 노예제도와 소금 독점이었다. 현재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소돔은 사해 근처의 평지 도시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는데, 영화에서 소돔은 주변국들에게 고가에 소금을 판매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롯이 보기에 사막의 거주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소금은 공기와 물이나 다름없는 공공재였고 그것을 독점하는 것은 악이었다. 더욱이 부를 위해 사람의 생명을 소유하고 거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소돔은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고 롯은 판단한다. 그리하여 롯은 처음에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소돔과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그런 의로운롯은 어쩌다가, 왜 소돔에 들어가 살게 되었을까? 영화는 소돔의 타락과 멸망보다 오히려 이 부분을 설득하는 데 더 큰 공을 들였다. 요단강변에 천막을 짓고 댐을 쌓아 농사를 준비하던 롯과 히브리인들은 엘람왕의 침략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댐과 마을을 잃고 만다. 요단강이 짠 물로 변하고 더 이상 농사를 기대할 수 없을 때 마침 여왕은 엘람으로부터 소돔을 보호한 공을 인정하며 히브리인들에게 땅을 내어준다. 애초에는 잠시 머물다가 요단강 건너편에 천막을 재건하면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자신들의 땅이 온통 소금으로 변한 것을 보고 롯은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롯에게 그것은 신의 계시이자 축복이었다. 양질의 소금을 값싸게 판매해서 토지세를 갚고 소돔의 착취를 막겠다는 비전도 새로 생겼다. 롯은 이제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던 소금을 팔기 시작했다. 사명(?)을 앞세운, 롯의 타협이었다.

얼마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소돔 사람들도 롯의 의로움과 공평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스마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노예들이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자고 주장했고, 소돔의 호의와 환대를 기억하는 롯은 노예들이 소돔인들의 재산이므로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한다. 롯은 자신들이 차근차근 잘 해나가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목적은 그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땅의 평화라고 말이다. 반면, 이스마엘은 소돔의 노예를 완전히 해방하는 것이 그들이 그 곳에 머물러 있는 이유라고 믿었다.

롯의 딜레마와 한국교회

결국 롯이 굳게 믿고 주장했던 명분은 소돔 여왕 베라의 계략과 함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더욱이 롯의 딸들은 아스다롯에 의해 유린당했다(영웅을 궁지에 몰아넣는 탁월한 계략과 불신, 성적인 타락에 도구로 쓰이는 역할을 모두 여성의 몫으로 챙겨놓은 당대 할리우드의 놀라운 일관성과 의지에는 일단 경의를 표한다). 그 와중에 소금을 팔아 소돔의 착취를 막겠다는 애초의 선의조차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히브리인들이 싼값에 소금을 공급하면서 소돔의 노예들이 더 학대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롯은 노예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생명이라도 지켜주고 싶어 했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이미 소돔의 안락함과 부에 동화된 히브리 장로들은 그들의 지도자 롯을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았다.

딜레마와 열패감에 빠진 롯의 형편은 내게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지난 반세기 한국교회의 그림자로 다가온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백성들 틈에서, 종족의 절반을 이끌게 된 보통사람롯은 하나님과 독대해서 언약을 다짐받았던 아브라함과는 또 다른 생각과 환경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되라고 배워왔고 배운 대로 꿈꾸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앙의 변방, 또는 세상 한복판에 머물면서 자신은 애초에 아브라함이 아니었음을 절감할 뿐인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세상은 그렇다. 지난 반세기 그들은, 우리는 자주 롯처럼 불의와 악을 묵인하며 타협하고, 좌절과 죄책감과 겸양의 어느 지점에서 위태한 줄타기를 해왔던 것 같다.

롯은 애초에 소금이 팔아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진실(진리)’은 무시한 채, 소금이 그 땅에 생긴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아마도) 소금 판 돈으로 십일조를 하고, 소금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어서 차후에 노예들을 사들이는 것으로 그들을 해방시키면 된다고, 그러니 참으로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역시 생명은 사고 파는 존재가 아니라는 본질적 믿음에 눈감은 결과였다. 그리하여 그는 생명을 유린하는 폭력 앞에서도 평화가 중요하므로 섣불리 관여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고, 그렇게 홀로 의롭게점잖게살아가면 언젠가는 세상이 자신들을 알아주고 본받게 될 거라고 믿었다. 소름끼치도록, 낯이 익지 아니한가.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그저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이왕 소돔 땅에 살러 들어간 롯이 멸망을 보기 전에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이 혹시 있었을까? 기억해야 할 믿음의 원리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뭔가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파국을 스펙터클로 감상하며 유유히 소돔땅을 홀로 빠져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무려 반세기 전, 이상하게원작을 각색한 알드리치의 <소돔과 고모라>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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