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역사 - hangug jadongcha yeogsa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자동차는 1903년 고종황제의 의전용 차량으로, 미국에서 들여왔다. 이어 1911년 가솔린 자동차가 등장하였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찌(寺內正毅)가 자동차 2대를 들여와 그 중 한대를 고종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왕실에서는 1913년에 순종용으로 1912년식 캐딜락리무진을 수입하였다.

자동차는 1918년 212대에 불과하였으나, 1931년 4,331대, 1932년엔 4,800대, 그리고 1935년~1940년 사이에는 8,000~1만 대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전시상황에서 강철, 고무, 석유 등의 결핍으로 자동차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1956년 서울에는 5,335대의 자동차가 있었다. 그 중 승용차는 1,439대, 트럭은 1,248대, 지프 1,031대, 버스가 810대 등이었다. 이처럼 증가한 자동차로 1959년 전국적으로 총 6,319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서울시내에 처음으로 교통신호등이 등장하였다.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은 1970년 7월 7일에 있었던 경부고속도로 개통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일일생활권’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자동차 문화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자동차는 1980년에 50만대, 1985년에는 100만대를 돌파하면서 마이카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 자동차 수출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루었다. 자동차산업은 두 번째 성장기라 할 수 있는 1990년대를 지나, 2006년에 384만대를 생산하면서 명실상부한 자동차산업 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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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손정목, 2004, 「자동차 사회가 되기까지 - 한국 자동차 100년의 역사(하)」, 『도시문제』39.
  • 2. 김천욱, 1999, 「[자동차 역사] 韓國自動車工業史抄-1」, 『자동차공학회지』 제21권 제1호.
  • 3. 강준만, 2006, 「한국 자동차의 역사, 1903~2006 자동차는 꿈을 싣고 달린다」, 『인물과사상』 통권 98호.
  • 4. 한국교통연구원, 2006, 『교통, 발전의 발자취 100選』
  • 5. 국가기록원, 2007, 『기록으로 보는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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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우리나라의 자동차 사정은 극히 열악했다. 남북한을 통틀어 7000여 대의 자동차가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이 전쟁 중에 개조된 목탄차였고, 그나마 반수 이상이 폐차 직전의 고물차였다. 당시 서울에는 목탄 버스 10대, 전차 101대, 택시 40여 대가 대중 교통수단의 전부였고, 이로 인한 교통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광복 직후의 서울 거리에는 초록 포장을 덮어씌운 200여 대의 승합 마차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진풍경이 일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전시에 비축되었던 휘발유가 시장에 풀려나오고, 고물 트럭이나 불하받은 일본 군용 트럭을 개조해 만든 트럭 버스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면서 교통난은 상당히 해소되었다. 1947년부터는 미군이 쓰던 트럭이나 지프 등 폐차량을 민수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가공이 어려운 정밀 부품이나 타이어 등은 새로 설립된 조선 자동차 배급 주식회사를 통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경에는 자동차 수가 1만 6000여 대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6·25 전쟁의 발발은 이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차량의 75%인 1만 2000대가 파괴되었고, 자동차 공업 시설도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6·25 전쟁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망치로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들고 미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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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불하받은 군용 폐차에서 빼낸 엔진을 얹어 재생 자동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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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지프 승용차>   
1958년 9월 14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국산품 전시회에서 있은 ‘시발 지프 승용차’ 생산 기념 경품 행운 추첨 대회 모습이다.

6·25 전쟁 직후에는 차량 제작과 정비를 담당하는 자동차 공업사들도 여럿 생겨났다. 1954년 1월에 생겨난 하동환 공업사(河東煥工業社)는 1955년부터 드럼통과 GMC 트럭 차대(車臺)를 이용해 규격화된 버스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말까지 전국 버스 수요의 60%를 공급했다.

1955년은 국내 기술 인력에 의해 조립된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始發) 자동차가 등장한 해이기도 했다. 시발은 미군 지프 엔진을 모방한 국산 엔진에 철판을 두드려 차체를 조립해 만든 지프형 승용차로, 같은 해 8월 광복 10주년 기념으로 열린 산업 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시발은 영업용 택시로 많이 쓰였으며, 1963년 생산을 중단할 때까지 총 2700여 대가 생산되어 이후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1960년대는 새로 출범한 군사 정부의 강력한 경제 부흥 정책 아래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조성된 시기였다. 1962년 4월 자동차 공업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5월에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이 제정되어 외국산 자동차와 부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국산화를 장려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조치를 배경으로 1962년 기아 산업·신진 공업사·새나라 자동차 등이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었다. 특히 재일 교포 박노정(朴魯禎)이 설립한 새나라 자동차는 일본의 닛산으로부터 블루버드 승용차를 부분 분해 부품(semi knock down, SKD) 상태로 수입해 조립·생산한 새나라 승용차를 시판해 큰 관심을 끌었다. 새나라 승용차는 폐차의 부품을 조립한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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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순정품(純正品)이었고 형태도 세단형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새나라 자동차는 이내 특혜 의혹에 휩싸이면서 1년도 채 못 되어 2700여 대만을 생산한 채 1965년 신진 공업사에 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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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라 자동차 조립 광경>   
새나라는 근대적인 대규모 생산 라인에서 만든 최초의 국산 자동차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기아 산업·아시아 자동차·현대 자동차 등이 외국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완전 분해 부품(complete knock down, CKD) 형태의 자동차 조립·생산에 나섰다. 신진 공업사는 1966년 이름을 신진 자동차 공업으로 바꾼 후 일본 도요타와 제휴해 코로나 승용차의 생산을 시작했다.

기아 산업은 1966년 생산을 시작한 T-2000 중형 트럭이 기적의 삼륜차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의 경이적인 판매 실적을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었다. 1965년에 설립된 아시아 자동차는 이탈리아 피아트와 제휴해 1970년대 초부터 피아트 124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 가장 늦게 설립된 현대 자동차는 미국 포드와 제휴해 코티나와 뉴코티나를 생산했다. 이 시기에 국내 업체들은 자동차 부품은 물론 조립 기술까지 외국에 의존해야 했으며, 국산화율은 20%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그나마 배터리·타이어·범퍼·페달·시트 같이 간단한 프레스물을 국산화하는 데 그쳤다.

이처럼 정체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기술 수준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정부가 1973년에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천명하면서 그 일환으로 발표한 장기 자동차 공업 육성 계획이었다. 이는 1980년까지 완전 국산화한 5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동차 수출 1억 5000만 달러를 달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외국에서 생산ㆍ시판된 적이 없는 엔진 배기량 1500cc 이하의 소형 승용차(국산화율 95% 이상)를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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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매년 5만 대 이상 양산할 수 있는 회사에 대해 금융·세제 및 행정면의 제반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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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자동차 공업 창립 7주년 기념식>   
1967년 5월 24일 창립 기념일을 맞아 신진 자동차 공업 주식회사에서 코로나 승용차 5000대 생산 및 크라운 승용차 제1호 발주를 축하하는 광경이다.

즉, 외국산 중형차를 조립 생산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높은 가격으로 인한 내수 부진, 에너지 과다 소비, 낮은 국산화율이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저가의 국산 소형 승용차를 양산하고 수출하는 것으로 정책의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지침에 맞추어 기아 산업·현대 자동차, 그리고 신진 자동차와 미국 제너럴 모터스가 합작하여 1972년에 설립한 회사인 GM 코리아가 1974년에 각각 사업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 중에서 정부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계획을 내놓은 것은 현대였다. 기아 산업과 GM 코리아가 일본 자동차의 모델을 도입해 내수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반면, 현대는 포드와의 합작 계약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고 준비해 왔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3사는 이러한 사업 계획에 따라 1975년을 전후해 잇따라 신차를 발표했다. 기아 산업은 1974년에 일본 마츠다의 모델에 기초해 국산화율을 80%까지 끌어올린 브리사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GM 코리아에서 이름을 바꾼 새한 자동차는 1977년부터 일본 이스즈의 모델을 들여와 제미니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아가 내놓은 브리사는 첫 해에만 1만 대가 넘게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75년에는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자동차 시장에서 궁극적인 승리자가 된 것은 현대 자동차가 1974년 6월에 발표한 고유 모델 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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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현대 자동차가 1974년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로, 이를 통해 국내 자동차 산업은 단순 조립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포니는 일본 미츠비시에서 엔진과 변속기 등 핵심 기술을 도입하고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Ital Design) 사에 디자인을 의뢰해 독자 개발한 국산화율 85%의 소형차로,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세계 자동차 박람회에서 공개되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포니의 등장으로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 모델 자동차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내 자동차 산업은 단순 조립 단계를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 포니는 1975년 11월 현대 종합 자동차 공장 완공과 함께 대량 생산에 들어갔으며, 국산 모델이라는 이미지와 판촉 정책 등에 힘입어 1978년 12월까지 10만 대의 생산 기록을 돌파했다.

포니는 우리나라 사람의 체형과 취향, 그리고 우리나라의 열악한 도로 사정에 맞도록 개발한 본격적인 국민차로 인정을 받았고, 현대는 포니가 본격적으로 출시된 1976년부터 기아를 밀어내고 다시 업계 1위로 올라서 이후 10여 년 동안 승용차 시장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 포니는 1976년부터 남미·중동·아프리카 등 외국으로 본격 수출되기 시작한 최초의 국산 승용차이기도 했다.

[필자]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