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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주체성: 한국의 영어 문제에 관한 인류학적 접근

[2015년 4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초청 강연]

한국에서의 영어의 문제는 그동안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외국어의 위치를 차지해오던 영어는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영어열풍’을 통해 국가정책, 교육제도, 노동시장 등의 영역에서 핵심적인 축이 되었다. 한국의 상대적인 단일언어문화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막대한 영어교육에의 투자,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 계급적 불평등, 서구체제에 대한 맹목적 의존, 영어의 이면에 놓인 제국주의적 권력 등 다양한 문제들은 영어를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놓았다. 이 영어열풍은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비평의 대상이 되었는데 주로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계급적 관점에서 (윤지관 2007, 남태현 2012) 또는 영어교육의 관점에서 (한학성 2000, 이병민 2014) 접근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인류학의 관점은 한국의 영어문제에 관한 논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언어인류학은 인류학의 핵심적인 연구방법론인 민족지학의 틀을 가지고 언어의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인지과학적 접근에 몰입한 현대 주류언어학이 보지못하는 언어의 다양한 특질들과 인간의 삶과 사회관계에 있어서 언어가 갖는 독특한 중요성을 이해하게 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언어를 인간과 분리된 추상적 구조로 보는 대신, 말하기가 곧 사회적 행위라는 전제 아래 언어인류학은 언어가 갖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함의를 깊이 있게 파악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영어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특히 유용한 언어인류학의 개념 중 하나는 언어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언어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나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전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언어사용자들이 갖고 있는 언어개념이 비전문가들의 그릇된 상식 정도로만 치부되었던 반면, 언어인류학에서는 그러한 개념들이 언어가 사회 안에서 사용되는 양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이해한다 (Silverstein 1979). 예를 들어 표준어가 사회 속에서 갖는 권력은, 표준어의 정의와 확산을 관장하는 국가의 언어정책이나 교육제도 등의 역사적 물질적 조건들을 기반으로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표준어”라는 기호에 “권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사용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다. 이처럼 언어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어떻게 언어의 차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차이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Irvine and Gal 2000), 결코 현실과 분리된 추상적 관념으로 볼 수 없으며, 사회 속에서의 우리의 언어행위 자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히 일상적인 언어행위도 언어 이데올로기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언어 이데올로기와 언어행위의 밀접한 관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언어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언어에 대해 우리가 머리 속에 갖고 있는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다. 언어 이데올로기가 언어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특정 신념을 근거로 한 논리적인 계산과정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감정, 정서, 느낌, 심성 등의 방식, 즉 주체성과의 깊은 관계를 뿌리로 하여 이루어진다 (Kulick 1998). 언어 이데올로기는 단지 언어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특정 언어사용자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과도 연관되고, 그를 통해 그 사용자를 바라보는 언어사용자 자신의 주체성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든 표준어의 예를 계속 사용하자면, 언어사용자들이 표준어의 가치를 지역어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현상은, 다양한 언어들이 갖고 있는 상대적인 가치의 목록에 의거한 논리적 계산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표준어의 권력은 개인 언어사용자들의 몸에 내면화된 표준어에 대한 느낌, 감정, 욕망 등의 차원(예를 들어 표준어가 상징하는 ‘정확성’과 ‘과학성’에 대한 신뢰, 표준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역어 사용자가 느끼는 당혹감, 정확한 표준어 사용을 통해 자신의 합리성을 드러내려는 욕망 등)을 바탕으로 재생산되고 강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Bourdieu 1991).

따라서 한국의 영어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인류학적 관점은 언어이데올로기-언어행위-주체성의 세 개념의 접점에서 찾아야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언어이데올로기, 언어행위, 주체성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한 가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두 가지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현상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영어문제를 고려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중요하다. 한국의 영어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주체성의 요소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잠시 밝혔듯이 한국의 영어문제에 관한 연구는,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계급적 관점에서 영어의 권력문제를 추적하는 경향과, 실증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영어교육이 갖는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경향의 두 가지 연구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둘 다 한국의 영어문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임이 분명하나, 이러한 연구방향은 한국인들이 영어에 대해 갖는 긴장, 불안, 좌절, 욕망 등 주체성의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윤지관 등이 참여한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2007)와 같은 경우 영어 앞에 서면 작아지는 주눅의 문제를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 연구가 민족지적 관점에서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어떻게 그러한 주체성이 언어행위를 통해 일상화되고 다시 영어의 패권을 정의하는 언어이데올로기의 재생산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한 분석으로는 이르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에 대한 민족지학적 천착은 한국의 영어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언어인류학이 핵심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영어열풍을 언어이데올로기, 언어행위, 주체성의 세 차원에서 차례로 살펴보자.

한국 사회의 영어에 대한 무한추구는 여러 가지의 언어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는데, 그 중 가장 핵심적임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한국인은 영어를 못한다”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발현되는 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몇년전 KBS에서 방송된 영어 관련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당신이 영어를 못하는 진짜 이유”이다. 한 영어학원은 광고문안에서 “10년넘게 공부해도 영어가 늘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공부방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에게 영어로 길 안내를 해 주어야 할 때 화자를 엄습하는 당혹감은 여러 유머와 코미디의 소재가 되는데 여기에는 이러한 당혹감이 한국인이라면 누구가 공감하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기영어교육, 조기유학, 영어마을 설립, 또 영어 공용화 등의 국가 정책에 관한 논란도 한국인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란에서 “과연 한국인이 영어를 못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목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기비하”(self-deprecation)의 이데올로기(Park 2009)라고 불릴만한 이 이데올로기는, 다시 말해서 한국인들은 영어학습에 쏟는 많은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못하며, 이것은 특정 한국인들(예를 들어 하층계급)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된다고 하는 믿음이다. 여기서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어능력에 대한 판단, 즉 누가 (영어를) 잘하고 못하느냐의 문제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객관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판단은 언제나 사회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발현되는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한국인들의 부족한 영어실력의 사실적인 반영으로 보기보다는, 한국인들이 정통성 없는 영어화자(illegitimate speakers of English)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한국인의 영어는 쓸모없는 영어, 문법만 암기하는 영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콩글리시와 동일시되고, 한국인은 10년 영어를 배워도 말 한 마디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한국인의 영어구사능력이나 영어의 전유가능성은 한국의 사회언어학적 풍경에서 모두 지워져버린다. 따라서 한국의 영어열풍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발생할 뿐 아니라, 동시에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며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한국인과 한국인의 영어에 대한 명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느낌과 체화된 반응이라는 주체성의 차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저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판단일뿐이라면 그것을 굳이 자기비하라는 이름으로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데올로기를 자기비하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영어가 중요한 언어임에도 잘하지 못한다는 자괴감과 열등감, 그리고 영어학습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력에도 여전히 영어를 못한다는 답답함과 절망감의 느낌과 단단히 얽혀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울렁증”이라고 이야기되는 감정을 생각해 보자. 영어를 다른 사람, 특히 영어를 쓰는 외국인 앞에서 해야 할 때 느껴지는 긴장, 두려움, 당혹스러움의 감정과 신체적 반응은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언어학습자가 아직 능숙하지 못한 언어를 사용하려할 때 나타나는 긴장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은 문화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어울렁증은 화자의 개인경험과 심리적 반응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사회 내에서 순환되는 영어에 대한 믿음들, 특히 영어에 대해 어떤 감정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믿음들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는 영어울렁증의 감정을 통해 매우 구체적인 발현의 공간(즉 화자의 신체)을 확보하고, 동시에 개인의 몸과 마음에 깊게 관여하는 영어울렁증은 자기비하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으로 느껴지게 만듦으로써 그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점 하나는 이 언어이데올로기와 주체성의 얽힘이 결국은 우리의 언어행위를 통해서 가능케 된다는 사실이다. 언어이데올로기는 자기 스스로 순환하지 않으며, 언어정책이나 미디어 텍스트의 매체를 통해 확산되기도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영어에 대해 말하고 이야기하는 행위, 즉 메타언어적 행위에 중요한 기반을 둔다. 위에서 말한 영어울렁증이 외국인 화자와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특수한 맥락 속에서 작용한다면, 우리는 좀 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영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행위들을 관찰함으로써 어떻게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와 감정이 우리의 언어생활에 개입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는 남들 앞에서 자신의 영어능력을 드러내보여야 하는 상황이 뭔가 난처한 상황으로 취급되곤 하는데, 이것은 그 개인이 실제로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와는 대개 무관하다. 서울 강남의 한 영어학원에서 함께 토플의 독해시험을 공부하고 있는 그룹의 대화에서 가져온 다음의 예를 보자 (Park 2009 6장 참조. 전사에 사용된 기호 설명은 여기). 이 예에서는 네 명의 학생들이 돌아가며 문제지의 영어지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여기서 미현은 자기가 맡은 문장이 잘 해석이 안 되자 앞에 앉은 상은에게 대신 해석을 해달라고 한다. 이에 대해 상은이 보이는 반응을 보자.

1        미현:    ((전자사전을 읽으며)) 흉내내다,
2                  …(1.1) [무언극을 하다].
3        상은:              [mimic 이랑] 똑같은 건가,
4        미현:  …(2.3) 무언극을 하다래.
5                  …(2.6) 아 언니 다시 해 줘 여기.
6        상은:   .. 어?
7        미현:   … 언니가 다시 해 줘요.
8        상은:   … 내가?
9                  @[@@@]
10       미현:     [어].
11                <@잘 모르겠어@>.[@]
12       상은:                               [@]
13                … 그, 마스크나, 의상, 을 입은,

전자사전에서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찾던 미현이 5행에서 상은에게 문장을 해석해 줄 것을 부탁한다. 다시 말해 이는 상은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영어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고, 더 나아가 미현보다 영어를 “더 잘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상은이 보이는 행동은 그 상황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우선 상은은 6행에서 “어?”라며 대화분석에서 말하는 수정을 시작하고, 미현이 7행에서 부탁을 반복하자 이번에는 더 구체적으로 ”내가?”라며 수정을 반복한다. 9행에서 이어지는 상은의 웃음은 그가 이 수정행위를 통해 현재의 상황을 “어색한” 문제 상황으로 구성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현이 10행에서 “잘 모르겠어”라며 해석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토로하고 함께 웃자, 상은은 그제서야 13행에서 문장의 해석을 시작한다. 대화분석의 연구가 말해주듯이 (Schegloff, Jefferson, and Sacks 1977), 위와 같은 수정의 기술은 일반적으로 대화 내의 상호작용에서 무엇인가가 문제되는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 화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해석해 보면, 이 예는 화자들이 타인 앞에서 자신의 영어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을 자신의 부족한 영어가 공개될 수 있는 곤란하고 난처한 상황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영어에 관한 언어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언어행위임을 보기위해서는, 화자들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 예를 들어 일본어 언어능력을 드러내야 할 때 화자들이 보이는 반응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다음 예는 위의 예와 똑같은 그룹이 잠시 쉬면서, 상은이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인데, 효민이 3-4행에서 선물의 포장에 쓰여있는 일본어가 무엇인지 남수에게 물었을 때 남수와 상은의 반응을 보자.

1        효민:    형 일본어, 못- 못 읽으세요,
2        남수:    .. 응? 음. 일본어 읽지.
3        효민:    이게 뭐예요,
4                  … 뭐라고 쓴 거예요,
5        상은:    읽어줄께 읽어줄께.
6        남수:    요시, 요시, 요시모토, .. 요시모토,
7                  … 또, 가타가나 <@뭐지 이건@>@@@
8        효민:    그게 무슨 뜻이예요?
9        남수:    .. 요시모토?
10       상은:    .. 요시모토- —
11       남수:    요시모토=
12       상은:    사람 이름 아닌가?
13       남수:    …(0.9) xxx 무슨 뜻이냐면,
14                …(1.7) 모르지. @@@

이 경우 남수는 첫번째 예에서 상은이 보인 수정의 행위를 보이지 않고 6행에서 곧바로 일본어를 읽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효민의 요청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던 상은도 5행에서 끼어들며 자기가 읽어주겠다고 자원한다. 물론 첫번째 예와 두번째 예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발생했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비교는 가능하지 않지만, 일본어와 영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의 언어행위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이 예들을 통해 분명해진다. 이는 첫째 예에서 상은이 사실은 영어문장을 별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었고 두번째 예에서는 남수도 상은도 딱히 속시원하게 일본어의 설명을 해 주지 못했음을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어에 대한 언어이데올로기(예를 들어 일본어는 한국어와 매우 비슷해서 별로 어렵지 않다는 생각, 영어보다 일본어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믿음 따위)가 이와 같은 차이를 낳는다고 무리없이 가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에서 나타나는 언어행위는, 앞서 말한 영어울렁증과는 비교했을 때 매우 일상적이며, 훨씬 더 미시적인 상호교류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위의 예들은 이러한 미시적 언어행위 역시 언어이데올로기와 주체성의 연관성에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위와 같은 언어행위는 미시적 상호교류을 통해 화자들이 언어이데올로기를 일상의 대화 속에 발현시키게 만든다. 영어와 일본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어행위의 차이는 곧 영어능력을 남들 앞에 드러내는 것을 민망한 행동으로 규정하고, 그로 인해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미시적 언어행위는 특히 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극히 자연스러운 반복행위이기 때문에, 화자로 하여금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가 아닌 “당연한 사실”로 여기게 하는데 더욱 강력함 힘을 발휘한다.

위의 예는 또한 일상적 언어행위도 주체성의 차원과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있는지 잘 보여준다. 첫번째 예에 나오는 상은의 경우, 그가 자신의 영어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정말로 (울렁증과 같은) 당혹감을 느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아마도 영어공부가 주 목표인 모임의 특성상 실제로는 별로 당황스럽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행위는 놀란듯한 억양, 당혹스러워하는 웃음 등 감정표현의 지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는, 화자가 어떠한 감정을 내적으로 느끼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언어행위를 통한 감정의 수행이 언어이데올로기의 발현과 재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함을 보여준다. 또 다른 면에서, 이러한 일상적 언어행위는 한국인 화자들로 하여금 영어에 대해 어떤 느낌과 주체성을 지녀야 하는지를 학습시키고 내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영어능력 드러내기를 문제시 삼는 언어행위를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수행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영어에 대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영어로 말하는 일에 대해서는 긴장과 두려움의 감정을 늘 느껴야 함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의 효과는 좀 더 특수한 다른 상황들에서 한국인들이 느끼는 감정, 예를 들어 외국인을 대할 때 느끼는 영어울렁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논의는 자기비하의 언어이데올로기, 영어에 대해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 영어에 대해 말하는 언어행동, 이 세 가지가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 상호작용을 통해 어떻게 한국인들이 정통성없는 영어화자로 자리매겨지는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얻은 통찰을 배경으로 인류학이 한국의 영어문제와 관련하여 내릴 수 있는 제언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우리가 영어열풍의 근본 전제가 되는 “한국인은 영어를 못한다”는 믿음을 비판적으로 짚어볼 수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영어와 관련된 한국인의 언어능력은 사회적 구성의 결과물일 따름이며, 이 이데올로기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그 근거가 되는 사회정치적인 관계들을 재생산할뿐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의 일상적 언어행위가 자기비하의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메타언어적 행위에 대한 좀 더 비판적 성찰이 요구됨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영어문제는 단지 국가의 정책이나 특정 계급의 이해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언어행위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으므로, 이러한 메타언어적 행위에 대한 언어사용자들의 자의식을 키우고, 영어에 대해 말하는 대안적인 방법들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영어울렁증, 주눅, 불안, 두려움 등으로 표현되는 한국인들의 영어에 대한 감정과 언어이데올로기의 연관성은, 시장과 자본의 요구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호응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더욱 큰 문제로 작용한다. 영어에 대한 주눅과 불안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더 높은 차원의 자기계발로서 영어학습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불안과 언어이데올로기의 연관성을 명확히 밝혀내는 일은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인간관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예에서 .. 와 … 는 짧은 침묵을, …(n.n) 은 좀 더 긴 침묵을 초 단위로 나타낸다. [     ] 는 다른 화자의 말과 동시에 한 말을, XXX 는 전사하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 말을 표시한다. @ 는 웃음을, <@   @> 는 웃으며 한 말을 가리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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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편). 2007.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서울: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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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rdieu, Pierre. 1991. Language and Symbolic Power.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Irvine, Judith. T., and Susan Gal. 2000. Language ideology and linguistic differentiation. In P. V. Kroskrity (Ed.), Regimes of Language: Ideologies, Polities, and Identities (pp. 35–83). Santa Fe: School of American Research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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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Joseph Sung-Yul. 2009. The Local Construction of a Global Language: Ideologies of English in South Korea. Berlin: Mouton de Gruyter.

Schegloff, Emanuel A., Gail Jefferson, & Harvey Sacks. 1977. The preference for self-correction in the organization of repair in conversation. Language, 53 (2), 361–382.

Silverstein, Michael. 1979. Language structure and linguistic ideology. In P. R. Clyne, W. F. Hanks, & C. L. Hofbauer (Eds.), The Elements: A Parasession on Linguistic Units and Levels (pp. 193–247). Chicago: Chicago Linguistic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