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기에 다시 바라보는 인혁당의 진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고문을 통한 조작극이었다 - 황현승 3일이 지난 5일 저녁부터 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관이 부드럽게 물어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직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조사 받는 것에 대한 경험도 전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소개하면서 자본주의의 흐름도 소유 위주에서 분배 위주로 바뀌어가고 있다 등등. 그 순간 담당 조사관은 “요시”(‘그래?’, ‘좋아’ 라는 정도의 일본말)라고 외쳤고 그는 곧바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만 이틀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매서운 고문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결국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써야만 했다. 그는 한때 격했던 감정의 편린들을 들춰내는 대신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보였다. 의문사위의 조사 과정에서 몇몇 증인들의 증언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사건이었으며 이것이 진상규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1,2심은 비상군법회의이었으니까 차치하더라도 대법원 판사들이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는 재판을 진행한 것에 대해서 양심고백을 해주기를 바랬다.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기원했다고 들었다 - 신동숙, 이영교 심지어 물에 약물을 넣어 성적 흥분을 일으킨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조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란 글을 쓰고 지장을 찍게 하는 고초를 겪은 부인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까지 환각상태에 시달리던 그 부인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밀려오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단자살을 꾀했으나 때마침 찾아온 친정어머니의 만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뒤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희생자만은 아닌 민주화운동의 헌신한 인사들이다 - 전창일
사실 75년 4월 9일 사형으로 이 세상을 강제로 떠난 8명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재야인사 축에는 끼지 못했으나 대부분 꾸준하게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인사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분단된 현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는 내용의 증언을 자신이 쓴 글이 담긴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진상을 알리는 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