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21 절 - sadohaengjeon 3jang 21 jeol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다

1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하다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2)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3)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 ㄱ)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ㄴ)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ㄷ)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2)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더 중요한 구원 (3:19-21)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우리 시간으로 오후 3)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전 6, 오후 3, 저녁 6,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전통적인 신앙 관습이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 관습을 따라서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향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하반신 지체 장애인을 메고 와서는 성전 문 앞에 내려놓고 갔다.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쓰지 못했다. 당시에는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생산 활동)을 가져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난했을 것이고, 어쩌면 가족마저 등을 돌리고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사람은 성전 문 앞에 앉아서(어쩌면 엎드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이렇게 구걸로 먹고 사는 사람을 거지라고 한다. 이제부터 편의상 이 사람을 거지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성전 문 앞에 자리 잡은 거지는, 때마침 성전으로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시작했다. 혹시 거지를 만나본 적 있는가? 요즘에는 몇몇 기차역을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데,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 마다 거지가 하나씩은 꼭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거지가 있다. 내가 이 사람을 기억하는 이유는 중학교 3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지체 장애인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듯이 이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서 구걸을 했다.

하루는 그냥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고 있기가 너무 심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구걸하고 다니면 하루에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거지 아저씨를 가만히 지켜봤다. 거지 아저씨가 다가갈 때 사람들은 크게 네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째, 인상을 쓰면서 대놓고 자리를 피하는 사람

둘째,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

셋째, 억지웃음을 지으며 거절의 손짓을 하는 사람

넷째, 돈을 주는 사람.

이 중에서 가장 많은게 둘째, 셋째이고, 그 다음이 첫째, 그리고 마지막이 돈을 주는 사람이다. 30분 넘게 거지 아저씨를 지켜봤는데 그날은 돈을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참 이상한게, 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한번 관찰을 시작하니까 버스 정류장에 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아저씨를 찾게 되었다. 심지어는 오늘은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까기다려지기 까지 했다. 아무튼 몇 달간의 관찰 결과, 거지 아저씨가 구걸에 성공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른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는 거의 실패였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도 처지가 비슷했을 것이다. 성전 안으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마다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서 애타게 구걸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구걸을 멈출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람들처럼 본체만체하고 지나가지 않았다. 관심을 보여주었다.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우리를 보라고 하니 얼마나 기대가 됐겠는가? 이건 뭐하고 같냐면 거지 아저씨가 구걸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가만있어 보자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것과 같다. 이건 100% 돈을 주겠다는 소리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했을 때 거지는 뭘 주려고 그러는 걸까하면서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3:5). 아마 거지는 동전 몇 개는 받을 수 있겠거니 했을 것이다. 김칫국을 좀 더 거하게 들이 마신다면 한 끼 식사비 정도까지 기대 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과연 베드로는 무엇을 주었을까

(3:6-8)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거지에게 준 것은 치유였다. 베드로는 거지를 고쳐 주었다. 이제 이 사람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거지는 성전 주변을 뛰어 다니면서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러한 행동은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생각해 보라. 웬 거지가 뛰어다니면서 큰소리로 찬양을 하는데 어떻게 쳐다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절로 눈길이 간다.

이 거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거지가 뭐가 좋아서 저러나? 미쳤나?” 하면서 관심을 가졌고,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저 인간이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되었지?” 하면서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베드로와 요한 주위에 몰려 들었다.

(3:10-11)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나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루는 버스 정류장 거지 아저씨가 나한테도 구걸을 했다. 그래서 나름 큰 맘 먹고 천 원 짜리 한 장을 쥐어줬다. 아저씨는 고맙다며 꾸벅 인사를 한 다음에 따봉을 하나 날려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거지 아저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친구들이랑 한참 수다 떨고 있는데 아저씨가 내 앞에 떡 하니 멈춰 서는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나한테 절을 했다. 그리고는 엎드린 채로 거의 30초 가까이 가만히 있는 거였다. 참고로 그 버스 정류장은 백화점 바로 앞에 있어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입모양으로 아니에요라고 하면서 손을 내 저었다.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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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베드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베드로 역시 손을 내저으면서 아니라고 부인했다. 뭐가 아니라는 것일까?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럼 어떻게 이 사람이 낫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 일의 근원과 그 의미에 대해 설명(설교)했다.

사도행전 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베드로와 요한이 지체 장애인을 고쳐 준 사건(3:1-10)

둘째, 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 (3:11-26)

혹시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는가?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도행전은 2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를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였다(2:14-42). 3장 역시 동일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와 이 일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분량을 보면 사건(치유)에 대한 서술 보다 베드로의 설교가 훨씬 더 많다. 단순히 구절 수로만 따져 봐도 1.5(10구절 / 16구절) 정도 더 많고, 양을 따져보면 대충 훑어 봐도 거의 두 배 가까이 더 많다.

항상 얘기하듯이 성경(을 포함한 모든 문학)에서 분량은 곧 강조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핵심내용)은 베드로와 요한의 기적적인 치유-선천적 하반신 지체 장애인을 한순간에 고친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치유의 의미와 목적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힌 다음에, 그럼 무슨(누구의) 능력으로 고쳤는지를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 특별한 약을 쓰거나 의술을 사용한게 아니었다. 베드로는 그저 딱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여기서 이름은 권위,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에 의지(믿음)해서 그 사람에게 치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 사람의 다리(장애)가 나았다.

이 모든 것이 사기 행각이 아닌 이상, 이를테면 그 사람이 애초에 장애인이 아니었다거나, 교묘한 장치를 이용해서 마치 나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 베드로는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치유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지체 장애가 아니라 정신 쪽에 장애가 있었다면, 혹은 한 순간에 낫지 않고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나았다면 심리적 효과니 어쩌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 지체 장애였고, 단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었다. 그 상태로 40년을 살았다(4:22).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 사람이, 그리고 가족들이 그동안 가만히 손 놓고 있었겠는가?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의사한테도 가보고, 약도 지어 먹여 보고, 하다못해 굿이라도 한판 벌여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는 순간 씻은 듯이(완전히) 나았다. 그러면 다른 답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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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그 이름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서서히 점진적으로 낫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완전히 나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그리스도이시다.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보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죽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정확하게 말하면 죽인 줄로 알았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는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시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바로 이 예수님(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구원자)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사람은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렸다.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는 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고 선포했다(참고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설명할 때도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설교의 최종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조금 의아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은 알겠다. 그래서 베드로가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 했을 때 그 사람의 장애가 고쳐졌다(장애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거랑 회개, 죄사함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정리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육체의 장애로부터 구원해주었고,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다고 선포했다.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은 육체의 장애에서 구원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장애는 이 세상에 국한된 일이지만, 죄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병을 고쳐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신가? 맞다.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신가? 맞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이런 저런 도움을 주는 분이신가? 이것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하나 빠졌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시다.

죄는 우리가 안고 있는, 그러나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이다. 죄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구원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은 곧 지옥의 심판을 의미한다. 죄를 해결하는(사함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구원을 받는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가장 긴급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구해야 할 것은 죄사함이다.

말씀을 맺겠다. 여러분은 죄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가?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저 이 세상에 국한 된 일에만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가? 만약 그 사람이 그저 병이 나은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갔다면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놓쳐 버린 셈이다. 병에서 구원 받는게 더 중요한가, 죄에서 구원 받는게 더 중요한가?

(3:19, 쉬운)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죄는 씻음받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키기 바란다. 혹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친구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라.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친구들은 자신의 죄를 절대 소홀히 다루지 않길 바란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혹 연약하여 죄를 범했을 때는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길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이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는 여러분들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