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 입단 후 첫 훈련에서 밝혔던 출사표. 그러나 김상진은 1년차, 2년차 시즌 모두 아쉽게 9승에 그치며 포부대로 10승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결국 1999년 6월 10일 오후 3시 5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향년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1.1.2. 부정적 명언[편집]꼭 긍정적인 명언만 있지는 않다.
1.2. 해외[편집]1.2.1. 미국[편집]
1.2.2. 일본[편집]
[1] 다만, 밈과 대중문화 관련 예시는 작성이 불가능합니다.[2] 前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3] 최동원이 생전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쫓은건 야구공인줄 알았는데 별이였으며,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주는 별이 되고싶다고 말한바 있다. [4]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2번밖에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거기에 이 진귀한 기록을 시즌 개막전이라는 무게감 큰 경기에 해냈다.[5] 그 해 한화 그룹의 슬로건이었다. 리그에서 한화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그룹에서는 만족했다는 후문.#[6] 93승을 기록해 7승이 모잘랐다. 당시 그가 100승을 채우고 은퇴하길 희망했지만 그놈의 롯데가 허락하지 못한 모양.[7] 사실 84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팀의 첫 우승을 캐리한 최동원 역시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으나, 추후 "최후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대답을 유보할 것"이라고 첨언하며 팬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8] 보통 야수들이 바로 1구로 송구할 수 있는 경우 주자는 낙담하고 그냥 걸어서 아웃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차피 뛰어봤자 공이 더 빨라서 아웃될 것이니 체력을 아끼기 위해 걸어서 가는 것이다.[9] 은퇴 경기였던 SK전에서 양준혁은 김광현에게만 3개의 삼진을 당하는 등 4타수 3삼진 1땅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건 상대 투수가 첫 피홈런 상대가 양준혁이었기에 마지막 삼진은 본인이 잡아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전력투구를 한 것도 있지만. 현역 마지막 타석이 바로 앞의 1땅볼.[10] 다만 끝은 좋지 못했다. 화려한 타선에 비해 투수진이 받혀주지 못해 4강은 고사하고 6위로 마감했으며 발언자인 김시진은 시즌이 다하기도 전에 경질되었다.[11] kbo 역대 한경기 최대 투구수는 1987년 5월16일 15이닝 232구 선동열의 기록이다. 여담으로 상대 투수인 최동원은 209구를 던졌다. [12] "No Fear"은 로이스터 감독이 주도한 타석에서의 공격적 접근법을 대표하기도 한다.[13] 사실 속도는 속력과 방향을 아우르는 벡터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문서 참조.[14] 물론 직접 대놓고 병신이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김응용 감독 특유의 어법상 김성근 감독을 아래로 보는 시선으로 한 말이었음을 감안하면 야신과 같은 그런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 아니라면 병신 말고는 없다.[15] 여담으로 그 해엔 양 팀 간의 승부에서 연장 승부가 유독 많았으며 무승부는 무려 2번이나 나왔고 모두 광주전이었다. 또한 KIA 타이거즈/2009년/6월/25일의 최정의 투수 등판도 어차피 원정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는 거 당시 규정 상 패배나 다름 없어 그냥 투수 아끼려고 실험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결국 끝내기 포일로 기아가 승리하게 되며(...) 기아가 유리한 위치를 가져 갔고 끝내 기아가 반 게임차로 우승했는데 SK야 승률이 떨어져도 당시 3위였던 기아에겐 아직 승리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못한 판단이었다.[16]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한 뒤,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로 복귀하고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던 선수인 김병현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고 월드시리즈 반지까지 가져간 그 시즌 맞다.[17] Back to Foulke, Red Sox fans have longed to hear it : The Boston Red Sox are World Champions![18] 이는 염경엽이 2015년부터 밴 헤켄이 선발로 나오지 않은 포스트시즌 경기를 전패(...)하면서 염경엽을 까는 의미로도 쓰이게 된다.[19] 이미 기아는 나지완을 40억에 잔류시키고 대권 도전을 위해 최형우를 100억에 영입하며 총알이 부족했다. KIA 입장에서도 단년 계약을 제시하는 건 이해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프차 대접을 받던 양현종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울 법도 하다.[20] 당시 김진성은 시즌 초반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았다가 실패했고 한 해 동안 거둔 세이브가 2개에 불과했다. 김태군의 말을 듣고 과감한 직구 승부로 경기를 지켜낸 후 김진성은 “그 말이 힘이 됐다. 태군이가 내려간 뒤 로진을 만지면서도 ‘태군이가 다 막아준댔어. 다 막아준댔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21] 정작 박경완은 2020년 SK의 감독대행을 맡으면서 투수혹사로 그닥 좋지 못한 평을 얻었다.[22] 그리고 허삼영 감독은 인터뷰처럼 한 발자국씩 전진하면서 부임 2년차에 삼성을 다시 가을야구 진출권으로 끌어올렸다. 근데 그 다음 해가...[23] 게다가 메이저리그에서 7승을 기록했던 봉중근과는 달리 매존은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본 적조차 없다.[24] 듣보잡 2군 투수를 선발 등판 시켰다가, 그 선수가 의외로 호투를 하자 바로 강판시키고, 급기야 수비에서 눈에 보이는 실수를 하며 공을 일부러 놓쳐주는 등 누가 봐도 '지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는 경기였다. 해당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는 "이런 경기를 중계하는 게 부끄럽습니다."라고 하기도. 물론 같은 시간대에 열리고 있던 OB와 해태의 경기도 져주기 매치 성향이 있었다는 평이 많은데, 문제는 이 경기가 지상파로 중계되고 있었다는 점. 물론 삼성의 2군도 털지 못한 롯데의 막장성도 큰 요인(…).[25] 사실 출장하지 않는 것 자체가 비난대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김영덕 감독처럼 9연타석 고의사구 시키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마지막 경기가 롯데전이었다는 점, 경쟁자였던 홍성흔은 출장해서 볼넷과 땅볼을 얻었다는 점, 그리고 마침 이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는데 홍성흔 타석에 박용택이 대화하며 웃는 장면이 방송을 타버린 점 등이 컸다.[26] 그리고 차우찬은 경쟁자가 스텟을 못 쌓도록 방해공작을 펼치는게 아니라 본인이 출장해서 스텟을 쌓는 쪽이니 팀 사정 제외하고 봐도 일리가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2013년에 손아섭이 3번에서 1번으로, 2018년엔 양의지가 5번에서 4번으로 전진배치되어 타격왕 타이틀을 노린 적 있다. 물론 팀 순위가 결정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27] 30억을 주고 데려온 장원삼은 FA가 아닌 트레이드로 영입한 케이스다.[28] 이것도 명목적으로는 FA가 아닌 트레이드의 방식으로 영입한 거다[29] 그 중 2008년은 압도적인 꼴찌였다.[30] 참고로 저 '형'은 다름 아닌 이승엽 선수를 가리킨다.[31] 참고로 인사이드 파크 호텔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의 4.1.문단으로 리다이렉트된다.[32] 웅얼대는 말투, 지나친 승빠질,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일본어 등등.[33] 결국 이 폭언으로 인해 구승민은 부진할때마다 투수같지도 않은 새끼를 줄여 투같새라는 부정적인 별명을 남기고만다. 김태형이 무심코 깐 한마디가 나비효과가 되어 선수 한명에게 어쩌면 은퇴하기 전까지 달라 붙을지 모른 꼬리표가 되버린 셈.[34] 앞서 "광현이는 프로에서도 잘할 것."이라 의례적인 평가를 내렸던 류현진은 저 말이 끝나고 "요즘 언론에서 광현이를 너무 띄워준다."고 맞섰지만 이 멘트는 묻혔다.[35] 다만 선동열의 사퇴는 삼성그룹 내의 인사 정리 과정의 일환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36] 멀리 안 가도 같은 한화 포수 신경현에도 못 비빈다.[37] 이 멘트는 양승호의 18번 멘트이기도 했는데 롯데 팬들은 이미 12년부터 재미소재로 즐기고 있었다.[38] 사실 당시 SK 타선은 8월 팀타율 최하위 이후로 타선이 침체되 타자들이 욕먹을만 했다. 다만 저 발언을 한 이후 탓한건 문제아 되는게 맞다.[39] 그전까지는 약물복용 선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도핑테스트를 실시한 적이 없었다.[40] 글래빈의 투구 스타일과 부합하는 말이라서 유명하긴 하지만, 글래빈의 독창적인 발언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말을 인용한 것인지 여부는 불명이다. 일단 글래빈이 실제로 했던 말은 맞다.유희관을 두고도 종종 언급된다.[41] 뉴욕 양키스의 산하 방송국인 예스 네트워크의 캐스터.[42] 30세가 되기 전에 메이저리그에서 150승 이상을 올린 몇 안 되는 투수. 다만 이후에 있었던 부상으로 인해 35세에 은퇴하여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 했다. 다만 60년대에는 10년 이상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투수 중 하나였다.[43] 당시 MLB에서도 중무리가 대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치고는 매우 오랜 선수 생활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44] 1950~70년대 브루클린 다저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감독. 스모키(Smokey)라는 별명이 있었다. 선수로서의 빅리그 경력은 카디널즈에서 대타로 한 타석 뛴 게 전부였지만, 브루클린 지역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 포함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4번이나 우승시킨 명장이다. 당대 최고의 투수 돈 드라이스데일, 샌디 쿠팩스를 키워내기도 했으며, 통산 2000승, 6할 승률, 감독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다.[45] 前 뉴욕 자이언츠 감독.[46] 전설적인 대학 미식축구 감독. 오클라호마 대학의 미식축구팀 헤드코치를 16년간 재직하면서 4번의 오렌지볼 우승과 3번의 준우승, 3번의 챔피언십 우승을 시켜내며 명문대로 성장시켰으며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94년~96년 동부 1위를 기록하고 95년에는 슈퍼볼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발언은 그가 불우한 청년기를 보낼 때 했던 말로 자서전에도 언급되어 있는 부분.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도 언급되는데, 주인공 백승수가 구단주 권경민에게 이 말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