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탈출 기독교 - syosaengkeu talchul gidoggyo

영화 쇼생크 탈출에 대한 신학적 읽기

by 노승수2021-01-14

앤디가 탈출한 당일 교도소장이 개인 금고에 넣어둔 앤디의 성경책을 펼쳤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그 때 출애굽기의 첫 페이지가 클로즈업 된다. 이는 감옥의 노역과 자유 없는 삶과 출애굽 사건을 서사로 유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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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기독교 - syosaengkeu talchul gidoggyo
쇼생크 탈출 기독교 - syosaengkeu talchul gidoggyo

영화 쇼생크 탈출은 1994년 개봉한 영화다. 제대 후 복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당시 유행하던 비디오 방에서 세 명의 친구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그런 느낌이 오래도록 남았다. 원래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인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영화화 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원래 종교가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그는 그의 소설에서 종교를 신랄하게 다루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화 된 '미스트'라는 그의 작품은 안개와 거기에 나오는 괴수들 때문에 등장하게 되는 사이비 종교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스트'가 종교의 어두운 면을 다루었다면 '쇼생크 탈출'은 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적인 복음의 서사를 영화로 옮겨 두었다. 이 서사를 위한 영화적 장치는 이렇다. 영화에서 쇼생크라는 감옥은 자유가 없는 세상에 대한 유비다. 실제로 쇼생크는 애굽의 제23왕조인 세송크(Sheshonk)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열왕기상 14장 25-26절에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5년에 애굽으로부터 침공을 받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침공해 온 왕의 이름이 시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애굽 역사에는 시삭으로 이름하는 파라오가 없다. 이 문제는 애굽의 이름을 모음이 없이 자음으로만 된 히브리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음가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삭의 히브리어는 שׁישׁק인데 음가를 옮기면 sysq가 된다. 그것이 바로 애굽의 22왕조와 23왕조의 파라오의 이름인 쇼생크다. 저자의 이런 작명은 이 작품이 성경적 서사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출애굽 서사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죄수들이 갇혀 지내는 감옥을 쇼생크라 명명하고, 영화 속 주인공 앤디(팀 로빈슨 분)가 15년 간 굴을 판 조그만 조각용 손도끼를 손도끼 모양으로 오려서 파낸 성경 안에 보관한다. 그리고 앤디가 탈출한 당일 교도소장이 개인 금고에 넣어둔 앤디의 성경책을 펼쳤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그 때 출애굽기의 첫 페이지가 클로즈업 된다. 이는 감옥의 노역과 자유 없는 삶과 출애굽 사건을 서사로 유비한 것이다.


이 서사에는 또 다른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메인 플롯에서 탈출의 당사자인 영화의 주인공 앤디는 회계사로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쇼생크에 들어온다. 마치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 많은 세상에 성육신 하신 것과 유사한 플롯을 구성한 것이다. 영화 속 죄수들은 간수가 허락하지 않으면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가면 소변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기 육체에 대한 자유도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앤디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편지 이중창인 아리아를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게 하는데 이는 앤디의 자유를 묘사한다. 모든 죄수들은 안 될 거라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주정부를 비롯한 관공서에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감옥 내에 도서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 보내진 기증품 중에 있던 LP판 중 하나를 튼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앤디의 친구인 레드(모건 프리먼)는 “그 목소리는 이 회색 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고 독백을 한다. 이는 앤디의 자유에 대한 묘사이자 그로 말미암은 구속의 묘사이기도 하다.


'피가로의 결혼'의 선곡 역시 모종의 장치다. 세빌리아 이발사인 피가로의 연인인 수잔나가 백작부인이 남편 알마비바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 적는 부분을 노래하고 있다. 보통의 중창들은 하모니를 이루고 다른 음역대의 가수 예컨대 테너와 베이스, 소프라노와 알토가 함께 노래하는 반면 이 중창은 소프라노들만의 중창이다. 또, 보통 중창에서 테너나 소프라노의 비중이 다른 반면 받아쓰기 형식의 이 이중창은 같은 비중으로 가사를 반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본받는(Imitation Christ) 삶처럼, 혹은 구원자와 구원받는 자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영화적 장치는 앤디에게 외부 물건을 공급해주던 죄수 레드와 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하던 죄수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다. 둘은 모두 가석방 심사를 통해서 석방이 된다. 그들은 가석방 후, 같은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고 같은 숙소에서 남은 삶을 산다. 그러나 앤디와의 약속이 없었던 브룩스는 자살을 선택하고, 앤디와 약속이 있었던 레드는 약속을 따라 약속의 나무 아래로 가서 앤디의 편지와 돈을 찾아 앤디가 있는 약속의 땅 멕시코 만의 파라다이스로 간다. 그렇게 앤디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영화가 마친다. 이는 성경에서 약속 있는 자와 약속 없는 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의 메인 플롯에서는 앤디가 쇼생크를 탈출하지만 실제로 앤디는 그 마음에서는 쇼생크에 갇힌 적이 없는 자유인이자 죄 없는 자였다. 반면, 레드는 죄인으로 감옥에 갇혔고 그의 마음은 죄로 인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존재로 쇼생크에서 벗어난 가석방의 삶이 오히려 불편했으며 브룩스처럼 자살을 고민하던 이였다. 그런 레드가 앤디와의 약속을 따라 위수지역을 이탈하여 파라다이스로 가는 사건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정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출애굽이다. 그런 점에서 서브 플롯의 레드의 탈출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탈출이며 이것이 모차르트의 아리아 이중창을 선택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는 이 영화에서 간수들과 교도소장이 마치 율법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엄중한 태도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성경이 자주 인용된다. 그리고 이 율법의 상징인 교도소장은 앤디의 탈출로 인해서 자살하고 마는데 그리스도의 구속이 율법의 고소를 무력하게 했다는 것에 대한 영화적 묘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자유 없는 우리 삶에 대한 묘사다. 무신론자였던 스티븐 킹이 천국과 내세의 삶을 묘사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천재 작가는 기독교의 서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하게 간파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한다면 그것은 “자유” 혹은 “해방”이라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영화는 분명히 해방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갇혀 있는 내면의 감옥과 사슬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멋대로 사는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앤디가 모든 불의에 맞서서 자유를 갈망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7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으며, 미국 의회도서관의 National Film Registry에 영구 보존되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멋대로 사는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앤디가 모든 불의에 맞서서 자유를 갈망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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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기독교 - syosaengkeu talchul gidoggyo
쇼생크 탈출 기독교 - syosaengkeu talchul gidoggyo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악명 높은 쇼생크 감옥에 갇힌 앤디 듀프레인.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인을 감옥에서 만나지만 교도소장에 의해 증인은 살해당하고, 앤디는 뛰어난 집중력으로 교도소장의 검은 돈까지 챙겨 탈옥에 성공한다. 드라마틱한 재미가 뛰어난 영화.

그런데 주인공의 탈출 성공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교도소장인 사무엘 노튼이다. 그는 자주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흥얼거린다. 소장실 벽에는 십자수로 장식한 “주의 심판이 이르렀다”는 성경 구절도 걸려있다.

그런 소장은 재소자들에게 악랄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자기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 재소자들을 외부 용역으로 제공한 대가를 가로채는 등 온갖 부정한 일에 매달리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앤디 듀프레인은 탈출 성공 뿐 아니라 교도소장의 악행을 폭로하여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다. 결국 교도소장은 체포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에서 자주 보긴 하지만 그 어떤 악인의 최후보다 훨씬 속이 후련할 정도다. 그는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자였고 천천히 스스로를 죽여간 삶이었다. 자기에 대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모른 채 ‘심판이 이르렀다’는 글귀로 장식된 벽 안에 갇힌 그는 그 악행에서 빨리 탈출하지 못한 것이 죽을 죄였던 것이다.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입에는 찬송, 벽에는 성경구절, 그러나 위선으로 가득한 그 삶의 대비. 영화를 보는 내내 목사의 눈은 불편했다.

앤디는 그런 교도소장의 지배하에 있던 쇼생크 탈출에 성공한다.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그 앤딩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갑자기 이 세상도 쇼생크처럼 느껴져 탈출하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악한 자가 철저하게 장악한 쇼생크. 재미있는 복선이지만, 위선적인 신앙인이 지위를 이용하여 듀프레인에게 자기 구두를 반짝거리도록 닦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자신은 조금도 빛나지 않는 신앙인, 세상이든 교회든 그런 자가 지배한다면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은 뻔하다. 그런 곳이라면 반드시 탈출해야 할 쇼생크일 뿐. 그러나 누굴 탓하기 전에 정말 탈출해야 할 곳은 내 안에서 나를 위선적으로 이끌어가는 내 욕망의 굴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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