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계약 결혼 - salang-gwa jeonjaeng gyeyag gyeolhon

네 줄 요약
1. 부부는 상호적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보편적 믿음이 있다. 서로에게 잘 해주어야 한다.
2. 부부는 배타적인 성적 접근권을 가진다. 즉 바람을 피워서는 안된다.
3. 부부는 양육권, 즉 양육의무를 분담한다. 아이는 같이 키워야 한다.
4. 부부는 혼인을 지속해야 한다. 한번 맺은 것을 쉽게 깰 수 없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음식, 의복, 주택, 언어, 관습 등 다양한 문화적 현상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가 거의 없는 현상도 있습니다. 바로 결혼입니다. 일단 혼인을 하지 않는 문화는 전혀 없습니다. 뭐. 과거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바로 사라졌겠죠. 그리고 혼인을 둘러싼 여러 가지 현상들도 아주 보편적입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아주 흡사한데, 이를 횡문화적 혼인 규칙이라고 합니다.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배우자 간의 상호적 의무와 배타적 성적 접근권, 양육권, 혼인 지속 신념입니다.


부부의 상호적 의무


부부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라고요? 그러나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친족 관계를 통해서 서로 협력하는데, 이는 친족 사이에는 공유하는 유전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포괄적합도를 올리려는 것이죠. 그런데 부부는, 근친혼이 아니라면, 서로 남입니다. 서로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없죠. 그래서 어제는 님, 오늘은 남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부부는 서로에게, 그 누구보다도,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굳이 아이 양육이나 성적 욕구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서적 지지와 경제적 협력, 윤리적 신의를 지켜야 하죠. 한마디로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설령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성적인 관계가 제한된다고 해도, 부부는 서로 강력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아내가 큰 죄를 지어도, 남편은 아내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법적인 정의보다 공동운명체로서의 부부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현상입니다. 왜 이런 독특한 관계가 진화했을까요? 물론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뭔가 명쾌한 느낌은 아니죠? 좀더 과학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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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로렌조 로또의 작품, ‘남편과 아내’. 여성이 들고 있는 강아지는 정절을 의미하며, 남자의 어깨에 올린 팔은 친밀감을 뜻한다. 남자가 들고 있는 종이에는 ‘Homo Nunquam(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 Lorenzo Lotto 제공

배타적 성적 접근권


진화적 입장에서 보면, 결혼은 번식을 위한 일종의 계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외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죠. 상대가 외도를 하면,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계약을 어기면 엄청난 도덕적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형사적 처벌도 받습니다. 아. 정확하게 말하면, 과거에는 받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간통에 대해서 아주 엄격하게 처벌하는 나라가 아직 많습니다.


사실 외도는 남녀 모두 합니다. 남성 인구와 여성 인구의 외도 횟수 합계는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동성 간의 외도를 제외하면 말이죠). 그런데 외도에 대한 남녀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보통은 남성이 더 길길이 성을 냅니다.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외도로 인한 남성의 손해가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손해가 동시에 발생하죠. 첫째 남성은 자신의 자손을 가지지 못합니다. 둘째 남의 자식에게 자신의 소중한 자원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입니다(아주 일부 문화에서 예외가 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외도를 목격한 남성이 상대를 죽이면,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로 취급됩니다. ‘눈 앞에서 아내의 외도 장면을 목격했다면, 과연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라는 공감대가 법과 판례에 반영된 것이죠.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결혼은 반드시 상대의 유전자를 통해 자손을 낳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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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피우다 발각되어 놀람. (Surprised, or Infidelity Found Out)’.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바람을 피우는 연인 사이의 큐피트는 조용히 하라고 입술에 손을 올리고 있고, 약혼녀를 이끌고 간 또다른 큐피트는 횃불을 들어 외도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의 두번째 규칙은 ‘서로에게 배타적인 사랑을 줄 것’이다. - Christian Wilhelm Ernst Dietrich Michael Vadon 제공

양육권과 양육 의무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는 진화적 과정을 통해서 점점 작아졌습니다. 인류의 먼 친척인 고릴라와 비교하면,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의 체구는 사실상 거의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변화는 구석기 시대부터 일어났는데, 동시에 남녀 사이의 성적 분업도 점점 시작되었습니다. 즉 남녀의 외모는 점점 비슷해졌지만, 하는 일은 점점 달라졌다는 것이죠. 아니 왜 이런 모순적인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육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떤 포유류보다도 긴 시간동안 수유하며 아기를 돌봐야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여성은 주로 육아를 담당하고, 남성은 보호와 자원공급을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이 나눠집니다. 남성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젖을 줄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의무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혼을 하게 되면, 보통 양육권은 어머니가 가져가고 부양 의무는 아버지가 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남성들도 있죠. 하지만 어머니의 양육권은 권리라기 보다는 의무입니다. 아이를 직접 돌보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아기를 돌보고, 남편은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야 한다는 집단적 관습이 법에 반영된 것이죠. 서로 다른 방법이라 해도, 부부는 반드시 자녀의 양육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 분담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인류 문화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성적 분업의 전통이 광범위하게 무너지고 있죠.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양육도 쉬워지고, 먹을 것도 풍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기를 잘 돌보지 않는 아내와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남편은, 그 반대의 경우에 비해서 더 큰 비난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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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황태자를 안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에딘버러 공(1949년). 오랜 모유 수유기를 거치도록 인류가 진화하면서, 남편과 아내 간의 분업화된 양육 의무가 발생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찰스 황태자에게 직접 모유를 수유했다(엘리자베스 여왕과 에딘버러 공은 올해로 결혼 69주년을 맞는다). - Robert Hardman 제공

혼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믿음


한번 결혼을 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혼을 하지 않느냐고요? 물론 살다 보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혼인 관계가 깨질 수는 있죠. 수렵채집사회에도 이혼에 대한 관습이 있고, 실제로 종종 갈라섭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3년만 살고 헤어지자는 식의 혼인 관습을 가진 문화는 거의 없습니다. 혼인 예비 단계를 거치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일단 결혼 의례를 하는 순간 부부는 ‘평생’ 혼인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합니다. 깰 수는 있지만,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미리 기간을 정할 수도 없습니다. 무기한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앞서 말한 일부일처제 현상과 더불어, 거의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됩니다. 역시 길어진 육아 기간의 영향이 큽니다. 자식을 낳아 사람 구실을 하려면 최소 20년은 걸립니다. 게다가 전통 사회에서 혼인은 서로 다른 혈족이나 부족 혹은 가문 간의 엄격한 상호 교환 규칙에 따라 진행됩니다. 서로 눈이 맞아 혼인하는 낭만적 결혼의 풍습은 그리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혼인을 깨는 것은 부부 둘만의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죽는 날까지, 종종 죽어서도, 혼인관계가 지속된다는 믿음은 상당히 보편적인 문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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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털을 뽑는 오래된 부부(Old couple plucking gulls). 혼인 관계의 네번째 약속은 ‘혼인이 지속된다는 믿음’이다. - Anna Ancher 제공

에필로그

많은 부부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갈등하고, 또 헤어집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맺어진 이상, 조금은 더 신중하게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오랜 진화사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혼인의 규칙들은, 분명 그럴 만한 적응상의 이유가 있어서 생겨난 것입니다. 한번은 더 숙고해도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 전문의. 경희대 의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대부속병원 전공의 및 서울대병원 정신과 임상강사로 일했다.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및 이화여대, 경희대 의대 외래교수를 지내면서,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 연구 중이다. 현재 호주국립대(ANU)에서 문화, 건강 및 의학 과정을 연수하고 있다. '재난과 정신건강(공저)'(2015),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2016) 등을 저술했고, '행복의 역습'(2014), ‘여성의 진화’(2017)를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