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의 관계 - balisaeingwa sadugaein ui gwangye

바리새인·사두개인(마태복음3:7-10)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바리새파(Farisai'o"/Pharisees)는 ‘분리하다’의 ‘파라쉬’에서 유래한 아람어 페리샤야(히브리어 파루쉬)의 헬라화된 어형으로 ‘분리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 집단의 대표자들입니다. 마카비 당시(주전165년) 유대인들을 헬라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수리아의 정책에 반대하여 선민(先民)으로서 정결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요한 힐카누스 통치(주전135년) 때 처음 바리새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리적으로는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조상의 유전을 중시하였습니다.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현실주의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두개인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신앙적 모범을 보여 일반인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당조직을 통해 전 유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만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유전을 내세워 이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내 형식주의, 율법주의, 권위주의자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약성경에서 95회 나오며, 복음서, 사도행전, 빌립보서에 나타납니다.

사두개인(Saddoukai'o"/ Sadducees)는 유대교의 당파 중 하나로 주전 2세기경부터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철저하게 현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이었습니다. 성문화된 율법은 받아들였지만 구전은 거부했습니다. 부활, 천사, 영생, 영혼 등을 믿지 않았습니다. 납세문제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사두개란 용어는 사독(qwOdx;)이라는 고유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헤롯가와 로마인들의 호의를 싫어하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을 미워하였습니다. 세속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과 유대교를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행위는 그들에게 하나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어울리지 않을 만큼 교리들이 독특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도 했습니다(행23:6-8). 그러면서도 상호협력했습니다.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고위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즉 죽음이편의 재물의 안전을 추구했고, 바리새인들은 죽음 저편의 안전을 추구했으나, 자기들만의 의로운(?) 것들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이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 같기 때문에 바로 예수님을 배쳑 했습니다.

모든 것을 관리하려는 욕심 때문에 최상의 성취를 망칩니다. 오늘날 교회에 바리새인들과 같고, 사두개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현세적이고, 또한 지나치게 율법적인 사람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말씀중심의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7)

바리새 파와 사두개 파는 예수님 당시에 열심당파와 함께 유대주의의 주류를 이루었던 활동적인 그룹이었다. 두 파의 기원에 괜해서는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바리새 파는 아마도 경건한 자나 성도를 의미하는 하시딕의 계승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파는 마카비의 반역 기간이나 그 전에서까지도 헬라의 문화와 관습을 반대하였다. 마카비의 혁명은 이들의 지원을 받은 신앙적인 원리들에 동기가 되었다. 바리새인이란 말은 분리주의자란 뜻으로 그들의 기원에 잘 어울리며 다른 이름 아래 하시딤을 개혁했거나 재조직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교도에게서만 아니라 세리나 죄인들에게서 자신들을 구별했을 뿐 아니라 율법을 모르는 유대인 군중들에게서까지도 분리하였다(요 7:49). 그들은 의식적으로 부정한 사람이나 사물과 일체의 접촉을 피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여러 면에서 바리새인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들은 타협자들이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집착하는 사람들과도 어울렸고 헬라화의 확산에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장파여서 일반적으로 대제사장은 이 파에 속했다. 두개파는 사독에게서부터 온 것으로 이 사독은 다윗통치시에 아비아달과 더불어 대제사장직을 분담했었다(삼상 8:17; 15:24; 왕상 1:35).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서 홀로 대제사장이 되었으며다(왕상 2:35) 마카비시대까지도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파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신앙에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믿지 않은데 비해 바리새파는 그 모두를 믿었다. 조세프스에 의하면 사두개 파는 몸의 부활과 함께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몸이 죽을 때 영혼은 파멸된다고 하였다. 역시 정경에서도 달랐다. 바리새인들은 교리와 권징을 위해 두 개의 표준을 인식하였다. 구약성경과 구전들이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정경으로 모세의 오경만을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서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자유와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하나님의 작정을 믿었으나 사두개인들은 작정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두 파가 모두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구원을 얻는데서는 같았다. 사두개인들은 현실주의자여서 죽기 전 이 세상에서의 소유를 중시했다. 토지의 소유자로 무역을 통한 재산증식이나 성전세 등에 관심이 컸다. 물질의 소유로 안전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과는 달랐으나 역시 그들의 노력이나 선행을 통한 구원과 안전을 꾀하였다. 이들은 모두 어떤 표준에 대한 자기 노력을 통해서 안전을 추구한데서는 외적으로 흡사했다. 역시 이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며 그를 십자가에 사형시키는데 서로 협력했으며(16:1,6,11; 22:15,23; 26:3,4,59; 27:20) 후에는 부활의 증거를 저지시키는데 하나가 되었다(27:62).1)
바리새인들은 회당과 제휴한 유대인의 중류계급인데 비해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적 귀족계급이었으며 성전과 제휴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권력과 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도계급이었다.
조세프스는 바리새인들은 서로 사랑했고 공동체와 조화스런 관계를 창출해 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야비했으며 그들의 동료와의 대화에서 외국인에게 하듯이 무례했다고 하였다(War 2.166).

1) William Hendriksen, Matthew(Edinburgh:Banner, 1973), pp.201-203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개로 오 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 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5~12)”

여는 말
오늘날 인위적인 가르침이 난무하는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떠한 가르침을 선택해야만 할까요? 사람의 가르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사람의 교훈이 담긴 교리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까? 진리를 가장한 그럴듯한 내용입니까? 아니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할 것입니까? 이렇게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며, 그 생명의 말씀을 따르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소가 저와 여러분의 동일한 간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문에 언급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첫째, 유대교의 종파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는 크게 세 개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절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두개파와 숙명론적인 엣세네파였습니다. 그 중간 그룹이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인이 죽으면 그 영혼이 새 몸을 입으나 악한 영혼은 음부에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천사들과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믿었습니다(행 23:6~9). 가장 큰 관심은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이었습니다. 바리새파의 주요 특징은 율법 존중주의였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해박하였습니다. 그 실력은 일반인도 인정하고 존경했습니다. 율법을 존중하려면 엄격주의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것은 무엇이나 배격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리주의를 따르게 됩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히브리어 어근은 “파르쉬”입니다. “갈린 사람, 분리주의”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의 명칭은 이 말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배격했습니다.

또한 조상 대대로의 전통을 준수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탈무드에 수록)”을 말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모든 율법을 일단 전통에 비추어 해석했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전통(유전)우선주의였습니다. 율법뿐만 아니라 예언서와 성문서들까지도 포함한 다양한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것을 주장하려는 권위적 관념이 의식주의로 흘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면서도 한편 진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사가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합리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는 가장 큰 세력을 가졌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큰 종파였지만 정당은 아니었습니다. 성전보다는 주로 회당을 중심하여 활동했습니다. 물론 정치적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율법에 더 치중하다 보니 서기관 같은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라는 새로운 선생이 나타나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자 여기에 가장 민감한 것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솔로몬 시대의 유명한 제사장 사독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당파입니다. 제사장하면 전통적으로 아론으로부터 계승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아버지는 사독이다”라고 할만치 솔로몬 시대 이후 사독은 이스라엘의 제사계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왕상 1:32~45).

사두개파는 성전의 제사 단체와 귀족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귀족적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지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재산으로 폭력과 거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야단스럽고 교만 방자한 귀족적 행태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그 권력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헤롯당)와 결탁했습니다. 사두개파는 하나의 종파를 넘어 정당을 형성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패삼아 로마 세력과 대항하면서도 항상 아부를 일삼았습니다. 율법으로는 보수적이었으며 천사와 귀신을 부정하고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마 22:23~33. 고전 15:12~54). 현세주의로 흘러서 경건한 마음과 태도를 잃어 버렸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권력과 권위에 누수가 될까봐 유대의 왕으로 왔다는 예수님의 소문에 민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에 민감한 이 두 집단(바리새파, 사두개파)과 첨예하게 대치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보다 더 잘 알려면 그 주변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이들 종파에 대하여서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또한 엣세네 파가 있습니다. 침수요한은 이러한 엣세네파의 일원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요한은 천사의 고지(눅 1:15)처럼 나실인으로서 나실인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지 엣세네파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마 11:9~10, 18). 중세기에 수도원주의가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은 엣세네파의 영향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에 제사장제도가 세속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왕권이 약화됩니다. 당연히 외부문화가 유입되니 희랍(그리스)문화의 강요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가 크게 위협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일어나게 된 것이 소위 하시딤으로 불리는 경건한 예배주의자 들이었습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도시와 마을을 떠나 광야나 동굴로 들어가서 은둔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럿이 모이게 되면서부터 집단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노동을 중시하며 유무상통합니다. 사유 재산을 부인하고 소박한 단벌 옷만 가졌습니다. 육식을 거절하고 성전 제사에도 불참했지만 예물은 드렸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고 독신을 주장했습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맹세를 중히 여겼습니다. 정결의식에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이방사람의 부정에서 격리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오늘날 국내에도 이러한 엣세네파의 영향을 받은 일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스스로 세속과 격리하여 생활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회원으로는 여자만 제외하고는 누구나 다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이 6,000명이었는데 비해 엣세네가 4,000명 정도였다니 대단히 활발했었나 봅니다. 흥미 있는 것은 예수님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에 대하여서는 공격적이셨지만 엣세네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하여 혹자는 예수님이 엣세네파였다는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상당 부분이 엣세네파의 가르침과 유사하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추측) 역시 바람직하지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습니다(요 2:23~25, 5:31~37). 이는 그분의 지혜의 근원이 사람이 아닌 성부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눅 2:40~52. 마 11:25). 그분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금욕을 권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요한이 나실인으로서 포도주와 세속음식을 금한 반면, 예수님은 그러한 음식과 포도주를 마셨습니다(마 9:9~10, 11:19. 눅 5:29, 10:38~42). 혼인잔치에도 참가하셨습니다(요 2:1~11). 주님은 사람의 교훈(가르침-교리)에 좌우되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지혜이십니다(잠 8:1~36. 사 11:2. 단 2:20~23, 9:22). 성경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골 2:2~3)?

둘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5~7)
지난주에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 그분 자신을 요나의 표적에 견주어 말씀하셨음을 상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의 일행은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건너편이라면 갈릴리 호수의 동북쪽인 벳새다일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 사이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어서 서로 속닥거렸습니다. 남은 떡을 잊고 가져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제자들은 저희들이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예수님이 눈치 채신 줄 알고 가슴이 덜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제자들의 마음은 괜히 놀라기만 한 것입니다. 준비해야 할 때에 준비하지 않고 갖추어야 할 때에 갖추지 않으면 이렇게 자격지심(自激之心)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은 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제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셨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그들은 오병 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보았습니다. 칠병 이어로 사 천명을 먹이시던 것은 아직도 그 부스러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 큰 기적을 보고서도 그들은 여전히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상태)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자신은 우스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믿음의 기도로 간절히 간구한 후에도 머리를 들면 금새 현실문제로 돌아가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고 머리를 끄떡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서면 또 다시 세상걱정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그들의 교훈(가르침-교리)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을 현실적이고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반대로 귀족으로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은 가난하고 천한 것들이 율법과 전통만 주장한다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서로 헐뜯는 적이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적대하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아 공격해 온 것입니다. 마치 정치적으로 앙숙이었던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된 것처럼(눅 23:12)”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먹을 것 걱정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성경대로 하는 체 하면서도 인간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물질주의의 표본이었습니다.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습니다. 거짓된 교리들도 들어보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미혹되는 자들은 그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위적이며, 거짓된 교리는 흥미를 갖지 말고 단번에 거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꾸지람(8~12)
주님께서는 현실의 먹거리에 치중한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음을 꾸짖고 오병 이어와 칠병 이어로 행하신 이적을 상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현실의 문제만 급급한 나머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누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치중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에만 버둥거린다면 사람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사단의 포획물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행한 이적들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가 떡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허탄한 가르침과 외식행위를 뜻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을 영위함에 있어 위험요소가 무엇입니까? 세속적이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위적인 요소를 첨가합니다. 성경에 없는 내용들이 마치 성경의 내용인양 버젓이 행세를 합니다. 종교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의 교리와 철학사상 그리고 연례적으로 행하는 각종 절기들 즉 성탄절, 추수감사절, 부활절...등과 같은 것을 행하고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게 행합니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숙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한 부류들이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진리인지의 여부를 성경으로 조명해 보지도 않고 추종하며, 답습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베뢰아사람들의 태도와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행 17:11~12).

세속적인 요소는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만 있어야 할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섞여서 진리를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의 가르침에 치중하는 자들 및 진리(하나님의 말씀)를 옳게 분변하지 못한 자들이 이러한 일에 앞장을 서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들이 먼저 오르게 될 것이며, 무지함으로 이들의 가르침을 추종하고 답습한 자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공의의 심판을 행할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순수하고 정직하며, 바르게 따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은총과 영생으로 보상을 하실 것입니다.

닫는 말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말씀의 교훈을 충분히 인식하셔야 합니다. 어떤 것은 내 기준으로는 대단히 좋아 보입니다(창 3:6. 잠 14:12, 16:2, 25, 21:2). 그러나 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은 기준이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됩니다. 논리적 이론에 설득 당하고 기적을 좇으며 자기 마음에 좋아하는 대로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푯대(빌 3:12~14)가 되고 그분의 말씀만이 내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어떤 신학적 사상, 이론, 교리나 능력이나 은사나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에 현혹되는 것은 모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교권주의자들의 전철을 밟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마 23:13~15).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의 교만 때문에 현혹되는 것입니다(마 23:2~7). 자신을 비우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복과 영혼의 만족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강론: (주의 날, 2007. 12. 30)
장소: 강북교회 예배당